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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에 대한 고민 없이는 진정한 음악도 없다"
일렉트로니카 밴드 ‘W’의 배영준을 만나다
  이성민(loverror) 기자   
만화가의 사려 깊은 고양이

고양이를 키우는 만화가들이 많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특히 여성 만화가들의 경우에는 강아지나 새 등 다른 동물에 비해 고양이를 기르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고양이를 소재로 한 만화가 많이 눈에 띄는 것도 그런 이유. 여기 유난히 만화를 좋아하는 음악인이 있다. 그리고 그는 '만화가의 사려 깊은 고양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만화가의 사려 깊은 고양이

이 맘 때쯤 너는 항상 조금씩 말이 없어지네
날 위한 생선 한 조각도 너는 잊어버린 걸까?

밤새 펜촉 긁는 소리
좁은 방 온통 어지러운 스크린 톤
차마 눈치 없이 너를 조를 수 없었네

비 내리는 아침 어느새
가득 웅크린 채 잠든 너의 곁에
가만히 난 누웠네

반짝 빛나던 네 손끝에
흘러가는 꿈 한 자락
나는 너를 믿을게
나는 널 기다릴게

차가운 전화벨 소리 도대체 무슨 얘긴 걸까?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너는 울고만 있었네

높게 귀를 세우고 동그란 나의 눈으로
변함없이 착하게 나는 널 기다릴게 이제…

/ W (배영준)
이 노래의 가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노래의 화자가 고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날 위한 생선 한 조각'이나 '귀를 세우고 동그란 나의 눈' 같은 표현이 고양이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무엇보다 제목이 '만화가의 … 고양이'인 것이다!).

'나'가 고양이니 물론 '너'는 만화가다('당신'이라든가 '주인님' 같은 존칭을 쓰지 않고 '너'라고 친구 부르듯 하는 것에서도 고양이의 특징을 읽을 수 있다. 만약 이 노래의 제목이 '…강아지'였다면 아마 달리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 만화가가 요즘 '조금씩 말이 없어지'고 있다. 게다가 방 안은 '펜촉 긁는 소리'로 가득 차있고 '스크린톤'이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마감이 임박한 것이다! 사랑하는 고양이에게 밥 주는 것도 잊은 채 밤새 원고를 그리던 만화가는 아침이 되어서야 잠이 든다.

이불을 펴고 편히 누워서 잠든 것이 아니라 '가득 웅크린 채' 잠든 것을 보니 아직 마무리되지 못한 원고를 앞에 놓고 피곤에 지쳐 잠든 모양이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고양이는 잠든 만화가의 곁에 누워 빗소리를 듣고 있다.

노래를 듣다보면 고양이를 키우는 한 만화가의 마감 날 작업실 풍경이 눈에 보이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더구나 중간에는 그 만화가의 연애(혹은 이별) 이야기도 살짝 들어가 있다. 고양이로서는 통화 내용이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없었겠지만, 만화가를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울고만' 있게 만든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아마도 무척 차갑고 냉정한 이야기를 전해왔기에 전화벨마저도 '차갑게' 울렸던 것이리라.

이렇게 가사만을 살펴보면 어쩐지 마음 아파오는 이야기지만 직접 음악을 들어보면 그 속에 담겨있는 희망의 여운을 느낄 수 있다. 노래가 끝나면 전화기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이어지고 상대편의 전화기에 신호음이 울리면서 곡이 마무리된다.

이는 만화가가 계속 울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제 마음을 추스르고(아마 마감도 끝내고) 다시 적극적으로 화해와 소통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는 암시가 아닐지.

만화가에 대한 따뜻하고 서정적인 묘사를 보면 이 노래를 만든 이는 만화가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만 같다. 만화가의 손끝에서 '흘러가는 꿈 한 자락'을 발견한 것은 고양이지만 가사를 쓴 작사가 자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너를 믿을게 나는 널 기다릴게'라는 가사는 만화를 통해 감동과 즐거움을 자신에게 선사해준 모든 만화가들에 대한 작사가의 헌사로 보이기도 한다.

W의 음악과 만화

▲ W의 김상훈, 배영준, 한재원
ⓒ2005 FLUXUS
이 노래의 가사를 쓴 배영준은 최근 2집 음반을 발표한 그룹 W(Where the story ends)의 리더. 그는 '여름'하면 떠오르는 그룹 '코나'의 리더이기도 했다. W의 다른 두 멤버도 코나에서 함께 했던 동료들. 코나의 곡들 중에도 만화에서 소재를 가져온 듯한 곡들이 기억나는 것을 보니(스파이더맨의 위기, 마녀 여행을 떠나다 등) 그의 만화에 대한 관심은 아주 오래된 일인 것 같다.

실제로 어느 방송녹화 현장에서 '창조적인 음악을 만들기 위해 특별히 노력하는 것이 있는가'란 질문에 그는 '만화를 보거나 장난감을 수집하면서 음악적 영감을 얻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농담으로 받아들인 관객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려버리기는 했지만….

"코나 시절 노래 중에 '슬픔이여 안녕'이란 곡도 있었어요. 그건 제가 아주 어릴 때 <어깨동무>란 잡지에 연재되던 만화 제목이에요. 가사를 쓸 때 문득 그 만화의 이미지가 떠오르더라고요. 제 기억엔 <어깨동무>에 연재되던 만화 중에 유일한 순정만화였던 것 같아요."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홍대 앞의 만화서점에 들른다는 그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여자친구와 함께 고양이에 관련된 만화가 보일 때마다 사 모은단다.

"실제로 고양이를 키우는 만화가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평소에 만화가란 직업에 대해서 일종의 경외감이랄까 존경심 같은 걸 가지고 있었고, 만화가들의 일상을 한 번쯤 음악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신카이 마코토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라는 짧은 애니메이션을 보게 됐어요. 거기서 영감을 얻어서 쓴 곡이 <만화가의 사려 깊은 고양이>예요."

코나 시절부터 W에 이르기까지 10년이 넘게 음악을 해오는 동안 그에게 만화는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친구였고 음악적 영감의 보고였다. W 2집 앨범의 타이틀곡이었던 <쇼킹 핑크 로즈>도 야자와 아이의 '나나'에서 영감을 얻어서 만든 곡.

▲ 잡지 <소년세계>
ⓒ2005 한국만화자료원
"그 작가가 그림도 잘 그리지만 아주 유니크한 대사들이 많더라고요. <쇼킹 핑크 로즈>에서 가장 중요한 가사는 '잊지 못할 밤을 만들어 드리지'라는 대목인데 나나의 대사를 차용한 거예요. 만화 속에서 그 대사가 나올 때의 상황이 대사와 아주 잘 어울려서 여성의 자존심이랄까 자신감을 아주 잘 드러내준다고 느꼈어요. 어떻게 보면 나나의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사가 아닐까 싶어서 노래로 만들었죠. 그럴 정도로 만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실제로 <은하철도의 밤>이라는 노래도 미야자와 겐지의 원작 소설보다는 마츠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에서 받은 영향이 더 크거든요. 만화가 가지는 그런 영향들을 무시할 수 없더라구요."

"어릴 때 보던 잡지 중에 <소년세계>란 잡지가 있었어요. <소년중앙>이나 <새소년>, <어깨동무>가 메이저 잡지였다면 <소년세계>는 B급 잡지였다고 할 수 있을 텐데(그래선지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더라고요) 이번 앨범 수록곡 중에 <소년세계>는 그 잡지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해요."

음악을 통해 세상을 본다

만화에서 받은 영감과 소재로 곡을 만들어온 것은 배영준의 표현에 의하면 '만화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표현'이었다. 생활비 중의 일부를 만화 구입비로 책정해 놓고 있을 정도로 만화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 '마징가를 입고 우주인을 만나다' 배영준의 만화 사랑은 남다르다
ⓒ2005 이성민
"아쉬운 것은 아무래도 우리 만화보다는 일본만화를 많이 보게 된다는 거죠. 일반 독자가 보기에는 우리 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도 쉽지 않구요. 하지만 전 우리 만화의 힘을 믿습니다. 대여점의 폐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요. 그래서 만화는 꼭 사서 봅니다. 우리나라 대중들은 자신들이 향유하는 문화에 대해서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아까워하는 것 같아요.

특히 어른들이 그런데, 어른들이 룸살롱이나 이런 데서 술 먹는 걸 보면 음반 한 장이나 만화책 한 권 사는 비용은 아까워할 필요가 없는 거거든요. 그렇게 일반 대중들의 인식이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런 걸 매스미디어에서 다뤄줘야 하는데 절대로 다루지 않더라고요. 작가들이 노력해서 좋은 작품을 창작해내는 건 물론 중요하지만, 그렇게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부분에서는 대중들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나마 최근 몇 년 사이에 그러한 인식들이 많이 좋아졌다는 게 느껴져요. 인터넷을 통해 스캔 만화를 보건 MP3를 다운받아서 듣든 간에, 그렇게 보고나서 정말 좋으면 찾아서 구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사서 봐야 된다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어요."

배영준은 독서가로도 유명하다. 방송으로 바쁜 요즘도 늘 가방에 책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틈날 때마다 읽는단다. 즐겨 읽는 책은 사회과학서적과 인문서적들. 2집 음반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재독철학자 송두율 교수를 모티브로 한 노래 <경계인>은 그런 평소의 관심사가 반영된 것이다.

"송두율 교수님이 들어보시고 너무 좋다고,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잘 표현했는지 모르겠다고 그러셨대요. 10년이 넘게 음악을 해왔지만 내가 음악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는 몇 번 없었는데, 그 얘길 듣고 정말 음악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밤에 거의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벅차더라구요."

▲ W의 2집, Where The Story Ends
ⓒ2005 FLUXUS
"세상 일이 궁금하면 신문을 사지 말고 스팅의 신보를 사서 들어보라는 얘기가 있거든요. 동시대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진정한 음악도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고민과 사회적인 이슈들을 다룬 곡들이 다음 앨범에는 좀더 많아지길 바랍니다. 그런 곡들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우리(W)가 늘 깨어있기를 원하고, 그런 곡들을 서슴없이 발표할 수 있을 정도로 좀더 대중들로부터 지지를 받길 원하고요. 이런 얘길 하면 그 전에는 '그건 네 생각일 뿐이지 대중들은 그런 거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길 들었었는데 지금 소속 레이블인 플럭서스에서는 그런 것들이야말로 아티스트-저희 회사에서는 가수라고 하지 않고 꼭 아티스트, 예술가라고 불러요-들이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니까 힘을 내라고 지원을 해줘요. 많이 고맙죠."

그는 무인도에서는 천재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단다. 진정한 작품은 끊임없이 주변에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그는 만화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좋은 대사나 문장이 나오면 꼭 따로 적어놓는다. 그리고 그것은 더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지금 그의 노트에는 어떤 반짝이는 문장들이 잠들어 있을까. W의 3집이 나왔을 때, 어쩌면 우리는 그 노래들을 눈을 감고서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음반 속에 들어있는 곡들은 틀림없이, 아주 눈부실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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