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찬 이야기 +_+

등록일시: 2001-12-16 19:06:24 / IP주소: hidden


<또한번 사랑은 가고>가 사랑을 받으면서 나는 제2의 가수의 길을 걷고 있다. 아직도 아저씨, 아줌마팬들 가운데는 내가 신인가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이번 앨범이 벌써 5집째다.

요즘 나는 예상치 못했던 과분한 인기에 두렵기까지 하다. 그럴 때면 ‘내가 이렇게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나’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나를 아껴주는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사랑 받는 가수가 되기까지의 진솔한 이야기를 스타스토리를 통해 팬들과 나누고 싶다.

가장사랑하는 부모님과 우리집 얘기부터 시작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딸 이길 무척 바라셨다고 한다. 두 살 위인 형이 있었기 때문에 예쁜 딸을 원하셨다. 그런데 부모님의 바람을 저 버리고 아들인 내가 태어났다.

우리 아버지는 당시 중학교 수학 선생님, 어머니는 피아노 선생님이셨다. 두분 모두 바깥일을 하신지라 내가 태어나자 두 아들을 키우기가 벅찼다. 부득이 우리 형은 할머니 손에서 자라야 했다.

형이 다섯 살 됐을 무렵부터 다시 함께 살게 되었고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우리 막내 이모가 자주 놀러 와서 어머니 대신 두 형제를 돌봐주었다.

그 때 이모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무척 날 구박했다. 꼬집고 때리기도 했다는데 못생긴 게 무슨 큰 죄라고…


등록일시: 2001-12-16 19:07:09 / IP주소: hidden




아버지 교육열…세번 전학 끝 강남 입성

어린 내가 보기에도 부모님은 무척 근검 절약 하시는 분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형제들은 꼬마시절부터 돈 주고 사야 하는 장난감 등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대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이는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아버지는 여행을 무척 좋아하셨다. 방학이 되면 산으로 바다로 형과 나를 데리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그 경험이 가족간의 정을 더욱 깊게 하고 나에겐 자연을 더 가까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줬던 것 같다. 또한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여행은 나로 하여금 풍부한 감정을 키우는데도 큰 도움이 됐다.

초등학교 때의 나를 떠올려 보면 참 순진했다. 순진했다기보다 아무 생각 없이 학교만 열심히 다녔다고 해야 하나. 누구를 좋아하거나 별로 기억이 날 만한 큰 사고를 치지도 않았고 그저 조용히 집과 학교를 왔다갔다하는 학생이었다.

교육열에 불타는 아버지의 성화 때문에 강남 8학군에 들어가기 위해 전학을 세번이나 다녔다. 이로 인해 친한 친구를 사귈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다. 또 집과 학교와의 거리가 멀어 형과 나는 버스를 오래 타고 등하교를 하느라 힘이 들었다.

그런데 한 번은 형이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다가 내가 기다린다는 걸 잊고 길거리에서날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적도 있었다.


[사진설명] 단란한 우리 가족. 아버지는 여행을 참 좋아했다.



등록일시: 2001-12-16 19:07:48 / IP주소: hidden


초등학교 때 시작된 내 건망증

두 살 위인 형과는 많이 싸웠지만 늘 붙어 다니며 놀았다. 여름에는 아버지와 함께 산이나 강, 바다 여행을 하며 서로의 꿈 이야기를 하고 겨울이 되면 아파트 공터에 올라가서 눈썰매를 탔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우리 동네에 물난리가 난 적이 있다. 우리집은 1층이었는데 무릎까지 물이 찼을 정도였다. 어른들은 걱정으로 낯빛이 검어졌지만 철없는 형과 나는 우울하지만은 않았다. 바로 장난감을 줍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당시 물위에는 문방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장난감이 둥둥 떠다녔다. 우리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장난감을 주우러 다니기도 했다. 형과 나는 또 큰 스티로플을 구해 올라 타고는 배타는 흉내를 내다가 혼나기도 했다

참, 초등학교 시절 기억 중 나의 건망증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날 교문에 들어섰는데 도시락 가방만 한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있어야 할 책가방이 없는 것이었다. 지금 상태가 좀 더 심해진 나의 건망증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물론 초등학교 때부터 가수의 소질은 조금씩 보였던 것 같다. 음악시간에 노래를 배우고 나면 꼭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 앞에서 율동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요즘도 어머니는 “너는 어려서 부끄러움을 많이 탔지만 노래 하나는 잘 했다”며 “그때부터 가수가 되려고 그랬나 보다”라는 말을 자주하신다.



등록일시: 2001-12-16 19:08:27 / IP주소: hidden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외가가 있는 캐나다로 어머니와 형이랑 이민을 갔다. 하지만 아버지 직장(중학교 수학 교사) 문제 때문에 1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캐나다에서의생활은 나에겐 두 가지 색다른 경험을 안겨줬다. 자유와 외로움이었다.

캐나다는 일단 한국보다 훨씬 많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해 줬다. 주변 환경도 무척 좋아서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외삼촌이랑 외할머니 이모랑 낚시도 다니고, 산으로 고사리도 뜯으러 다니며 자연을 가까이서 접할 수있었다.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가족들과 놀러 다니는 일은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많이 외로웠다. 영어를 할 수 없었고, 워낙 시골이었던 탓에 어울린 만한 한국 친구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1년 정도 생활하고 다시 찾은 한국이 그 사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고작 1년인데 낯설어지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하지만 분명히 낯선 걸 어떡하나.

일단 내 외모가 너무 달라져 있었다. 머리카락을 노란색으로 염색하고, 청바지도 찢어 입고 다녔던 나는 돌아와서는 많은 규제 때문에 적응이 힘들었다. 그래서 많이 방황했고 학교 생활에서도 겉돌았다.

이런 나를 가만히 놔둘 부모님이 아니다. 처음엔 나의 힘든 점을 이해하고 기다렸지만 방황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버지가 무섭게 나를 혼냈다. 아버지한테 많이 맞으면서,정신 차리고 다시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사진설명] 초등학교 졸업 직전에 캐나다로 이민을갔다. 캐나다 한 수영장에서.



등록일시: 2001-12-16 19:08:56 / IP주소: hidden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나는 무척 달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가 아마 사춘기였나보다. 당시 나의 관심사는 모두 노래였고 부모님이나 가족들과 대화가 줄어들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음악을 들으며 지냈다.

어릴 때 배운 피아노를 밑천 삼아 나는 혼자 팝송을 듣고 피아노를 치며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즐겨 듣고 불렀던 노래는 김건모 형의 <혼자만의사랑>이었다.

또중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내 짝사랑의 상대. 난 12반, 그 아이는 13반이었고 반장이었다. 전교에서 유명할 만큼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무지 예뻤다. 그러나 난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한 채 속으로만 앓다가 중학교를 졸업하게 됐다. 지금도그녀가 가끔 생각난다. ‘지금뭘 하고 있을까.’

고등학교 1학년 때 큰 사고를 쳤다. 음악에 깊이 빠져 있던 나는 드디어 굳은 결심을 하고 부모님께 “가수가 되겠다”고 폭탄 선언을 한 것이다. 나의 학업을 위해 세번이나 이사를 할 만큼 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셨던 부모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가수가 되겠다는 내 뜻을 쉽게 받아주지 않고 화를 내셨다. 결국 나는 소풍 가는 날 짐을 싸서 가출을 감행, 친구네 집에 있다가 음악을 무척 좋아하시던 선생님 댁으로 집을 옮겼다.



등록일시: 2001-12-16 19:09:32 / IP주소: hidden


“가수가 되고 싶어 어쩔 수 없이 가출을 했다”는 내 말을 들은 선생님은 “너의 뜻을 펼쳐라”며 선생님 댁에서 머물 수 있게 받아줬다.

처음 가출할 때는 최소한 일 주일은 버텨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고작 사흘 만에 집으로 전화를 했다. 어머니는 울먹이면서 “네 뜻대로 하게 해줄 테니 얼른 들어와라”고 했고, 난 못이기는 척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계속해서 ‘어떻게 하면 가수가 될수 있을까’만 고민했고, 그러다 드디어 기회를 잡게 됐다. MBC FM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개최하는 ‘별밤 가족 마을 캠프’에 갔다가 장기자랑에 나가게 됐고, 운좋게 대상을 거머쥐었다.

이 기회를 잡아 오디션을 볼 수 있었고 곧바로 음반 작업을 시작했다. 가끔 노래가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할 때도 많았지만 가수로 데뷔한다는 생각만 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 갈 무렵 음반을 내고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음반나왔을 때는 막연히 좋았고 TV에서만 보던 연예인들을 만나 설레기도했다. 하지만 마냥 좋을 수는 없었다. 가수 활동과 학교생활을 병행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더구나 고3이던 내겐 참 버거운 일이였다. 힘들어도 학교는 꼭 가려고 애썼지만 떨어지는 성적은 애써도 어쩔 수 없었다.



등록일시: 2001-12-16 19:11:02 / IP주소: hidden


친구들은 가수가 된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내가 수업에 자꾸 빠지게 되면 공부도 도와주는 등 많이 성원했다.

연예계 입문해서 가수 (김)원준이형과 (김)혜림누나 류시원 윤정수형과 가깝게 지냈다. 지금도 친하게 지내지만 당시 내가 많이 의지했고 또 나에게 도움을 준 선배들이다.

또 이지훈 김수근 양파는 그때 같이 데뷔한 동갑 친구들로 어린 나이에 활동을 하는 등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인지 굳이 많은 이야기 하지 않아도 맘이통했다.

가수 데뷔 첫해 학교를 제대로 가지 못했다. 학업을 병행하는 것이 힘이 들었던 탓이다.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인만큼 나도 대학 진학에 적지않은 고민을 했다.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과를 목표로 입시 준비를 했다.

방송 스케줄이 끝나고 자정이 되서야 실용음악과 진학을 위한 레슨을 받을 수 있었다. 맘고생은 컸지만 레슨을 해주던 선생님과 음악에 대해 진지한 얘기도 나누고 막연히 생각만 했던 음악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아예 다른 학교는 쳐다보지도 않고 서울예대에 원서를 넣었다.그리고 합격했다.



등록일시: 2001-12-16 19:11:37 / IP주소: hidden


고3 때였던 97년 10월에 발표한 2집 앨범은 1집에 비해 큰 반응을 얻지 못했고, 결국 이듬 해 1월에 지지 부진하게 활동을 마감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작업했던 1집이 성공을 거두자 음반 작업을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소홀하진 않았지만 음반을 내면 대중의 사랑은 그냥 따라오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2집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고 이 실패로 인해 가수 활동과 음반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음반은 실패했지만 98학번으로 서울예대에 입학을 했고, 1년 동안 정말 열심히 학교 생활을 했다. 처음에 우리 과(실용음악과)친구들은 내가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거리를 두었지만 꼬박꼬박 학교에 출석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모두들 맘을 열었다.

매일 밤을 새면서 친구들과 함께 작곡과 노래 연습을 했고, 축제 때는 주점에서 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하면서 대학 생활의 추억을 만들었다. 연예인으로 살았던 고3 생활을 보상 받으려는 듯 학생 역할에 충실했다. 언제 생각해도 항상 다시 돌아가고 싶은 소중한 시절이었다.

또하나 대학1년 때의 봄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나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생긴 것이다.



등록일시: 2001-12-16 19:12:08 / IP주소: hidden


같은 과 친구였던 그 아이는 처음 보는 순간 내 마음을 빼앗았다. 그리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첫 눈에 난 ‘필’을 느꼈다. 그 후 며칠 동안 끈질기게 쫓아다닌 끝에 우리는 캠퍼스 커플, 바로 CC가 될 수 있었다.

함께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며 데이트를 즐겼다. 하지만 ‘ 첫사랑은 깨어진다’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아이는 1학년 2학기가 시작될 무렵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내 곁을 떠나갔다. 외국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말만을 남긴 채.

갑작스런 이별에 난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몰랐다. 당시 내 마음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은 음악뿐. 나는 음악에 파묻히기로 하고 곧바로 3집 준비를 시작했다.

소속사의 형편이 좋지 않아 직접 음반 프로듀서까지 하면서 어렵게 음반을 만들었다. 2집의 실패로 또 다시 대중들이 외면하면 어쩌나 무척 걱정이됐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3집 음반도 실패했다. 소속사와 내기로 한 마지막 음반으로 제대로 홍보도 하지 못한 채두 달 만에 활동을 끝내야 했다.

두 장의 앨범이 연달아 외면당하고 소속사와의 계약도 종료된 뒤 난 삶의 의미를 잃었다.



등록일시: 2001-12-16 19:12:30 / IP주소: hidden


당시에는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부모님을 보기도 민망해 집을 나와 혼자 지냈다. 부모님 도움 없이 생활을 유지하려다 보니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이 방황의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주변의 좋은 사람들 덕택이었다.

대학의 같은 과(서울예대 실용음악과) 친구들은 물론이고 (김)원준이 형과 (김)혜림이 누나는 항상 나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주며 위로 했다. 제일 힘든 시기에 깊은 애정을 보여준 그 사람들의 고마움을 난 평생 마음 깊숙이 간직하며 살고 싶다.

(김)혜림이 누나 소개로 지금은 싸이더스에서 일하는 박진 사장님을 만났다. 그 분은 당시 이휘재 남희석 유재석 등 인기 개그맨형들의 매니저를 맡고 있었다. 이 사장님과 계약을 하고, 난 다시 힘을 내 음반 작업에 들어갔다.

4집음반 전체를 내가 직접 프로듀서했고, 모든 곡을 내가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애착이 가는 앨범이다.그래서 기대도 컸지만 또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4집까지 실패를 거듭한 난 사고의 전환을 했다. 내가 ‘대중가수’인 이상 대중의 사랑을 받는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니까 (2006-07-18 23:03:09)
난 4집이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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