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미가 쓴 칼럼


어쩌면 필요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곪을대로 곪아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한 상처를 앞에두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은 아파서 곤욕이고, 봐야 하는 사람들은 또 나름의 이유로 괴롭다. 또 그 고름이 흐르는 상처를 보면서도 상처인 줄 모르는 이들은 그 우매함으로 가엾다.

나는 가수로서의 비장한 사명감으로 속내를 꺼내놓으려는 건 아니다. 모두 알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집단최면에 빠진 것처럼 어디론가 끌려들어가고 있는 지금, 대오각성의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자기 당위로 몇 가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나는 매일 러닝 머신 위에서 최소한 두 시간 이상의 시간을 보낸다. 기초 체력 없이는 콘서트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헬스클럽은 러닝 머신 위로 스물 네 시간 음악방송을 하는 케이블 TV를 틀어준다. 어제도 역시 눈 둘 데 없어 그 음악방송을 보며 달렸다. 신인가수 K의 노래가 몇 번이나 반복되어 나왔다. 그만큼 돈을 많이 쓴 덕분에 많이 나올 수 있는 것이겠지, 하면서도 불쾌감이 밀려왔다. 물론 뮤직 비디오를 만들면서부터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었음은, 화제가 되었던 어느 드라마의 두 남녀 주인공이 출연해서 캐나다 땅 위로 눈물을 떨구는 것으로 당연히 알 수 있었다. 무차별적인 로비 없이는 이렇게 많이 나올 수 없는 것이 쇼 비즈니스의 생리이다. 나는 몇 번이나 반복된 그 뮤직 비디오를 보고 나서야 운동을 마칠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가수에게 뮤직 비디오는 필수불가결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반드시 꽤 인기가 있는 연기자들을 떼로 등장시켜 외국에 나가 총을 들고 한바탕, 그야말로 쇼를 보여줘야한다. 당연히 누군가는 죽어야 하고 그 옆에서 울부짖는 순간에 노래는 클라이맥스가 된다. 그래야 극적 긴장감이 최고가 될 테니까. 노래는 잘 기억되지 않는다. 눈물 흘리며 죽어간 연기자의 얼굴은 오래 남을지언정. 이것은 정말 뒤바뀐 행태이다. 노래의 분위기에 맞는 뮤직 비디오를 제작해서 다양한 형식으로 대중에게 어필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유행처럼 번진 요즘의 이 작태는 본말전도의 정점이다.

좀더 자극적이고 좀더 선정적인, 그래서 크레딧이 올라갈 때 방영되더라도 대중이 리모컨에 손 대지 않도록 해야 하는 뮤직 비디오가 있어야 오락 프로그램에 나가 개인기라도 한 번 할 수 있으며, 그런 비디오를 제작하고 있어야 가수는 볼 품 없더라도 그 연기자들을 취재하러 나오는 연예정보 프로그램에 한번 더 노출될 수 있는 것이다. 외국의 경우, 어느 나라도 이렇게 연기자가 등장해서 천편일률적인 스토리 라인의 뮤직 비디오를 만들지 않는다. 물론 배우가 등장하는 뮤직 비디오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노래를 위한 시너지로 그 분위기에 맞는 배우를 등장시키는 것이지 우리나라처럼 그 배우를 보여 주기 위해 노래를 틀어주는 건 아니다.

이런 비디오의 제작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제작비 상승을 가져와 더 엄청난 문제를 만들어낸다. 뮤직 비디오를 제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 가수의 음반을 내는 데에는 최소한 7~8천만 원 정도가 소요된다. 그것도 스스로 곡을 만드는 싱어 송 라이터의 경우이고 곡값이 꽤 나가는 작곡가의 곡을 쓰는 경우라면 총 제작비는 훨씬 뛰어넘는다. 게다가 뮤직 비디오마저 제작하게 되면 최소한 1~2억이라는 제작비를 추가해야 한다.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명백하다. 제작자들은 대중문화 발전에 기여한다는 사명감도 물론 있겠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장사꾼이다. 그들에게 문화 창달자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뮤직 비디오에 추가될 비용으로, 쉽게 말해 런던 필하모니를 데려올 수도 있었고, 최고의 음향 엔지니어를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사꾼들은 이익이 보이는 장사를 선호한다. 투자가 많으면 그 만큼 빨리 뽑아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 아닌 사명인 것이다. 많이 뽑아내려면 많이 팔려야 하고, 많이 팔리게 하려면 많이 노출시켜야 한다.

10대의 지갑을 털어야하고 그 지갑을 열게 하는 정답도 그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10대의 기호에 딱 맞는 인물을 가려내 온갖 개인기를 연마시키고 한두 마디 애드립으로 10대의 목젖을 흔들 유머를 교육시키면 된다. 그렇게 생산된 가수를 오락 프로그램에 내보내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고 웃기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막대한 자본을 들여 만들어 놓은 해외 풍광 속의 인기 배우, 그 그림 좋은 뮤직 비디오가 준비되어 있지 않던가. 그 뮤직 비디오를 프로그램이 끝날 때쯤 틀어주면 본전은 건진다. 문제는 없어보인다. 대중이 원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면죄부도 있다.

하지만 대중의 기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온전히 대중의 문제만은 아니다. 고만고만한 가수들을 양산해내는 제작자의 문제가 가장 크다. 여기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획일화된 가수들만 봐야하는 시청자들의 곤혹도 곤혹이지만 소모품이 되어 인생 자체가 한낱 해프닝이 되고 마는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자각이 없는 것.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대부분 잊혀지는 그들 중 잘되면 제작자고, 안되면 헛된 인기의 맛을 잊지 못하는 폐인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잘돼서 제작자가 된다고 해도 자신이 양산되었던 체제 그대로 복습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다. 만의 하나, 어느 한 제작자가 각성을 통해 열린 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영세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방송국이라는 커다란 메커니즘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악순환의 고리 안에서 헤매고 있을 수밖에. 폐수가 하수구에서 역류하는 것을 보면서도 개선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왜 요즘의 댄스가수라 불리우는 가수들이 스스로를 가수라고 칭하는지에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일생을 통틀어 녹음할 때 말고는 노래라고는 하지도 않고 특별히 잘하는 것 같지도 않은 댄스, 그 잘 추지도 못하는 춤 때문에 숨을 허덕인다며 작동도 되지 않는 마이크를 꽂고 나와 흐느적거릴 것이었다면 과연 그들은 정말 가수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어느 스튜디오에서 사운드 엔지니어의 푸념을 들으며 그 의아함은 더욱 깊어졌다. 그룹 F의 녹음을 하고 있던 이 사운드 엔지니어는 매 음마다 컴퓨터로 교정을 해주지 않고서는 들어줄 수 없는, 어찌 보면 음치 탈출 프로그램에나 나와야 할 것 같은 아이 몇몇에 대해 아주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요새 애들이 다 그렇지 뭐”하며 들어본 나 역시, “우리 귀 씻고 오자”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노래도 못하면서 왜 가수라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걸까? 좋은 용모와 귀여운 춤솜씨를 주특기로 사랑을 받고 싶었다면 가수가 아니고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찍어내듯 만들어진 복제품이 되어 녹음 때는 기계의 도움을 받고 방송 때는 입만 벙긋거리는 그들은 가수라는 이름을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미니 콘서트에 나온 그룹 S였다. 콘서트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단 한 곡도 자신들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들이 목소리를 낸 것은 “이번 앨범의 의상 컨셉은요~”가 전부였다. 그들이 가수일까? 과연 가수가 새 앨범에 대해 할 얘기가 의상 컨셉 말고 없는 것일까? 한심한 노릇이었다. 얼마 전 L의 앨범을 만든 동료의 이야기는 더욱 가관이었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음정이 달라지는 음색을 일일이 수정해야 하는 작업이 너무 고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L은 나올 때마다 이상한 소품으로 인기를 모았고, 그 인기를 등에 업고 마이클 잭슨의 비디오가 무색할 정도의 물량이 투입된 뮤직 비디오로 한 순간에 가수가, 그것도 몇 십만 장이나 팔리는 가수가 된 것이다.

녹음할 때 한 번 고생하면 가수가 된다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다. 연기자처럼 매번 긴장을 하며 새로운 연기를 펼칠 필요도 없다. 음반에 입을 잘 맞추고 희한한 소품으로 눈길만 끌면 된다. 그러면 좋은 목청을 만드느라 고생할 필요도, 감정에 몰입된 노래를 부르느라 혼절할 까닭도, 훌륭한 소리를 만드느라 엄청난 스태프들을 모으지 않아도 가수인 척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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