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일오비 스토리 by 정석원 - 첫 번째 콘서트


 
 
 
콘서트 날짜는 잡았는데 표는 팔리지 않고
 
윤종신이 진행하는 '우리는 하이틴'은 점차 청취율이 높아졌다. 날이 갈수로 내가 초대 손님으로 방송에 참여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나의 출연이 너무 잦아졌을 경우에는 호일형이 대신 출연, 호평을 듣기도 했다. 덕택에 팬들이 잘 모르던 공일오비의 멤버들과 음악을 널리 알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92년 11월 중순경이었다. 드디어 공일오비의 첫 콘서트 일정이 잡혔다. 92년 1월 12일 63빌딩 컨벤션 센터라고 했다. 종신이는 공연 일정이 잡히기 무섭게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이 콘서트의 홍보에 나섰다.
공연날짜가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멤버들은 천하태평이었다. 호일형과 나, 그리고 형곤과 현찬이는 각자 집에서 자신이 맡은 악기연주를 익히고, 객원 가수들도 집에서 테이프를 틀어놓고 연습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멤버들이 모두모여 연습하는 리허설은 공연을 1주일 앞둔 1월 4일에야 시작됐다. 연습장은 신사동에 있는 스튜디오 하이트. 연습시간은 매일 저녁 6시부터 자정까지 6시간이었다. 드러머 현찬을 포함한 공일오비의 멤버들과 윤종신 최기식 이장우 성지훈씨 등 객원가수들,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씨, 그리고 코러스를 맡은 MBC합창단원 세 사람까지 모두 연습에 참가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괜찮았는데 '우리는 하이틴'을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종신이가 문제였다. 그는 생방송이 끝난 후인 오후 10시 이후에나 겨우 리허설애 참가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무두 기다려야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까지도 나는 공연의 내용이나 질에 대해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관객들이 오지 않아 공연의 내용에 대해 걱정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만나는 친구들마다 공일오비가 공연을 하는데 표가 팔리지 않으니 친구들을 50명쯤 데리고 오라며 선전에 더 열을 올렸다. 공연을 직접 주관한 대영기획이나 매표관리 등 대행한 정프로젝트에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 예매가 잘되는냐고 물어 보았지만 대답이 신통치 않았다. 불과 2,3일을 앞두고부터는 아예 잠도 오질 않았다.
 
 
충격, 충격, 충격...
 
관객이 조금밖에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나의 걱정은 공연이 열리는 1월 12일까지 계속됐다. 전날 오전까지만 해도 팔리지 않은 예매권이 아직도 많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공연장에 도착했다는 극성스런 팬들 몇 사람이 공연장 주위를 기웃거리는 외에는 별일이 없었다. 동료들이 한사람씩 도착했지만 나는 여전히 좌불안석이었다.
그러나 나의 걱정은 그야말로 기우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잠시후에 밝혀졌다. 나는 무대에서 공연준비를 하느라 공연장 밖의 사정을 도무지 알 수 없었는데 대영기획과 정 프로젝트의 직원들이 들락거리며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난리법석을 피우기 시작했다. 내가 공연장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별로 보이지 않던 팬들이 오전 10시가 지나고부터 몰려들기 시작,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는 얘기였다. 정오가 될 무렵에는 팬들이 너무 많이 와서 큰일이라는 염려의 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예매에서 남은 입장권 1천수백장이 삽시간에 다팔려 나갔다고 했다. 1천여명 이상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입장권을 구입한 사람이 공연장의 정원인 3천명을 넘어 4천여명에 육박해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고민이라는 설명이었다.
결국 대영기획의 유재학사장이 결단을 내렸다. 공연장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팬들을 설득, 되돌려 보내기로 한 것이다. 공연을 보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줄을 섰던 팬들을 되돌려 보내느라 많은 관계자들이 진땀을 흘렸다. 뒤늦게 나마 63빌딩으로 몰려와 줄을 선 팬들에게 일일이 사과를 하며 수없이 절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는 정말 엄청난 사건이었다. 관객들이 오지 않으리라는 걱정 때문에 처음 공연 얘기가 나올때부터 펄쩍 뛰며 반대한 것은 물론 전날 밤까지 잠을 설치던 나의 입장에선 굉장히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그렇게 많은 팬들이 몰려왔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질 않았다. 아니, 공일오비의 팬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공연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4천여명이 넘는 팬들의 대다수가 대학생들이라는 누군가의 지적은 더욱 나를 놀라게 했다. 꿈이 아니고선 도무지 믿을수 없는 사건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오프닝 곡이 열광의 도가니로
 
문제는 공연시간인 오후 3시가 임박해 터졌다. 오랫동안 줄을 선 팬들이 되돌려 보내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도 내에서 많은 관객을 입장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공연장의 정원 3천명을 꽉 채운 것은 물론 관객들 사이에 만들어 놓은 통로에도 팬들을 입장시키는 바람에 무대 앞에서 뒤로 이동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공연장에는 4천 5백여명이상이 입장한 것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우리는 무대 뒤의 대기실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오후 3시가 넘었는데도 공연장의 실내등이 꺼지지 않는 것이었다. 공연장의 암전을 신호로 우리가 무대 위로 올라가기로 했는데 도무지 감감소식이었다.
무대 앞에서 장내정리를 총지휘하던 대영기획 김경남 실장의 얘기를 들어보니 63빌딩 컨밴션 센터의 관계자들이 만일의 사태에대비하기 위해 암전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공연장 내의 모든 통로가 관객들로 막혀 있기 때문에 돌발사태가 일어나면 속수무책이라 실내 조명등을 절대로 끌 수 없다며 버틴다고 했다.
공연장 내부에서 이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객석 뒤어 서 있던 대영기획의 여학연 부장과 김실장이 들고 있던 무전기로 통화해 겨우 알아낸 사실이었다. 암전을 놓고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사이에 30분이 후딱 지났다. 결국 양측은 공연을 위해 타협을 했다. 실내조명을 반만끄고 공연을 시작키로 한 것이다.
오후 3시 40분 경이었다. 우리로선 어쩔 수가 없었다. 안전이 무엇보다 제일 중요하다는 주장에는 잘못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엔 무대고 객석이고 훤히 밝은 어정쩡한 상태에서 무대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첫곡은 공일오비 2집에 수록된 '친구와 연인'이었다. 종신이 리드 보컬을 맡은 곡인데 템포가 빠르고 활기차 공개방송이나 공연에서 공일오비의 오프닝 곡으로 즐겨 쓰는 곡이다.
실내등을 켜놓은 채 공연이 시작돼 조명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었는데도 관객의 호응은 대단한 것이었다. 무대와 객석은 순식간에 하나가 되어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무대 위의 다른 멤버들을 얼핏 바라보니 모두 신들린 사람들처럼 연주를 하고 있었다. 나도 뒤질새라 열심히 키보드만 두드려댔다. 우리들은 어느새 1집 수록곡 '때 늦은 비는'을 연주하고 있었다.
 
 
아찔했던 순간들
 
그래도 '때 늦은 비는'의 시작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객원가수 최기식의 노래가 반주음악의 박자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박자가 틀린다고 기식에게 알려야겠는데 나와는 거리가 멀어 신호를 보낼 수가 없었다. 그의 뒤에 서서 기타를 연주하던 호일형이 눈치를 챈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호일형은 박자가 틀렸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기식의 뒤로 다가서서 박자에 맞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기식은 박자를 가르쳐 주려고 호일형이 어깨를 두드리는 걸 노래를 잘 부른다는 칭찬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기식의 노래는 졸지에 열창으로 바뀌었지만 그의 노래와 반주 음악은 더욱 확연하게 어긋났다. 우리로선 속수무책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미 엎어진 물. 애를 태우면 뭘하나"하고 중얼 거리는 순간이었다. 기식의 노래가 갑자기 정상의 박자로 돌아왔다. 호일형과 형곤은 그때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내게 눈짓을 보내왔다.
그 외에는 연주와 노래에 아무 이상이 없었다. 객석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H에게', '친구와 연인',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등을 연주할 때는 정말 신바람이 났다.
공연은 어느새 막바지로 향해 치닫고 있었다. 공연의 마지막 곡인 '텅빈 거리에서'를 종신이 부르기 시작할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텅빈 거리에서'가 끝나고 우리는 일단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객석의 박수와 '앙코르!'를 외치는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우리는 다시 무대에 올라 앙코르 곡으로 '이젠 안녕'을 노래했다. 무대에 올랐던 모든 사람이 하나씩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하며 교대로 모자이크식으로 노래하는 이 곡은 공연에서 마지막 곡으로 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교대로 노래하다가 모두 관중에게 손을 흔들고 합창을 하며 막을 내린 것이다.
공일오비의 첫 공연은 그렇게 끝났다. 관중들이 객석을 모두 빠져나간 한참 후에도 그들의 열광적인 함성과 박수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했다. 모두들 흐믓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예기치 않은 공연의 대성공에 들떠 잔뜩 상기된 모습이었다. 우리는 정말 공연이 그렇게 대성황을 이루고 사고도 없이 연주까지 만족스럽게 해내며 끝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공연 뒤의 후유증을 아십니까?
첫 공연의 열기와 흥분의 여파는 공연이 끝나고도 몇 달 동안이나 계속됐다. 멤버들 모두 그 멋진 공연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특히 호일형의 증세가 심했다. 우리들은 공연당시 친구 몇 사람에게 부탁해 공연장면을 8mm비디오로 부탁해 녹화해 뒀는데 무려 3개월 동안 거의 매일 같이 그 비디오를 틀어놓고 낄낄대며 감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후유증도 컸다. 공연이 끝난 직후부터 걸려온 팬들의 항의 전화와 항의 편지가 바로 그것. 공연장까지 와서 줄을 섰다가 공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간 팬들의 항의 에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팬들의 항의는 그것으로 기치질 않았다. 공연장의 뒤쪽에 앉아있던 팬들도 소리만 들었고 무대는 하나도 보지 못해 억울하다며 항의해 왔기 때문이다. 공연이 열린 63빌딩 국제회의장 실내는 무대앞이나 뒤쪽이나 객석의 높이가 같아 앞쪽의 관객들이 일어서면 뒤쪽의 관객들은 무대를 볼 수가 없었던 것.
관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강제로 동원시킨 내 친구들 불만도 마찬가지. 마지못해 공연장에 왔던 이들은 "무대는 물론이고 네 코뻬기조차 보기 힘들더라"며 내게 무차별 공격을 가해왔다. "첫 공연이라 부족한 것이 많았으니 이해해달라" 고 얼버무리긴 했지만 나중의 공연을 위해 명심해야 할 사항이 정말 많았다. 공연장면을 녹화한 비디로를 몇 번이고 다시 보며 잘못된 점을 찾아보기도 했다.
비디오를 보면 무대 위의 내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문제중의 하나였다. 비디오를 찍은 친구에게 "나도 명색이 공일오비의 멤버 중 하나인데 어째서 내 얼굴은 보이지 안느냐?"고 물었더니 도저히 내 모습을 잡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었다.
키보드를 무대 뒤쪽에 놓고 그것도 앉아서 연주한 탓이었다. 비디오 촬영을 무대 위에서 하지 않고 주로 객석에서 했기 때문이다. 비디오로도 내 모습을 잡을 수 없었다면 객석에서도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나 다름 없었다. 팬 서비스를 위해서라도 다음부터는 키보드를 무대 앞쪽에 비스듬히 놓고 연주도 서서 해야겠다는 결론도 나왔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객석에서 내 얼굴 보기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공연장 바닥이 경사진 곳이 아닐 경우에는 무대 자체를 상당히 높여야 객석에서 잘 보인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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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http://town.cyworld.com/015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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