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1) 츠네오
2005. 7월
이유는 여러가지 였지만 결국은 하나였다.
내가 도망쳤다.
츠네오는 지극히 평범한 23세의 대학생이다. 얼굴은 적당히 잘생겼고, 학교에서 유명한 미인 카나에도 그에게 관심을 보인다. 걱정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명랑 청년이다.
할머니의 유모차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그가 알바 하던 마작장에서. 안에 마약이 들었다느니, 돈다발이 들었을거라느니 하는 주변의 이야기에 츠네오는 약간의 호기심을 갖지만,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건 자기와 다른 세계에 속하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죽은 아이의 미라가 들어있지 않을까」하고 피식웃는다.
시작은 어느 새벽의 골목길. 언덕에서 굴러떨어진 유모차는 츠네오의 발치 앞에, 마음의 문턱 앞에 멈춰선다. 안에 든 것-사람이든 동물이든-이 다치지 않았을까하는 염려와, 안에 든게 뭘까 하는 호기심이 뒤섞인채 그는 덮인 천을 걷는다. 가려진 천 아래에선, 충격으로 놀란듯한 조제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뭍으로 내동댕이쳐진 물고기가 아가미를 퍼덕거리듯.
말 없이 츠네오를 노려보던 조제는 난데없이 잽싸고 날렵하게 부엌칼을 휘두른다. 원안에 들어온 모든 것에 가차없이 주먹을 날리는 고독한 복서 같기도 하고, 상처입지 않으려 눈을 세운채 발톱을 휘두르는 새끼고양이같기도 하다.
비장애인들에게 위협 받아온 조제에겐 반사적으로 몸에 익은 자연스런 행동이었지만, 츠네오에겐 그렇지 않다. 놀라 엉덩방아를 찧은 츠네오는 조제를 바라본다.
침묵 속에 그저 서로 노려보는 두 사람을 둘러싸고 바람이 분다. 각자 떨어진채 안정되어 있던 두사람의 세계에도 바람이 불어온다.
2.
하지만 여전히 츠네오에게 조제는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나와 다른 것' 이었다. 비장애인이고 대학을 다니는 츠네오와 장애인이고 학교라곤 가본적이 없는 조제 사이의 '차이'는 너무나 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 교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어떠한 메타포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마움의 표시로 아침이나 먹고가라는 할머니의 말에 츠네오는 망설인다. 겉보기에도 낡아빠진 집에 사는 이들에게서 밥을 얻어먹는 것은 왠지 미안해지는 일이었다. 아니. 그건 단지 어두컴컴해 보이는 그들의 세계에 발이라도 들여놨다가는 옷이라도 더럽혀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숨기기 위한 변명거리 였는지도 모른다. 일을 핑계삼아 거절하려는 그에게 할머니는 따끔한 말을 던진다. 귀가 얇고 마음이 여린 츠네오는 그말 한마디에 또 「네에-」하고 만다.
영화속에서 두 사람을 연결시켜준 것은 밥.
누구나 살기 위해 밥을 먹는다. 부자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비싼 음식을 먹고, 가난한 자는 집 구석에서 변변찮은 상을 들지만, 결국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같다. 또한 결코 돈이 많다고 해서 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그런 솜씨로 만들어진 캐비어보다, 손맛이 잘배인 계란말이 하나에서 더 큰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음식의 참된 맛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식'은 평등하다.
쭈볏쭈볏 방안을 둘러보던 츠네오의 낯설음은 계란말이 한 조각을 입에 문 순간 환하게 펴진다. 츠네오와 조제 사이에 존재하던 두껍던 벽도 조금 허물어져 내린다.
작은 호감을 갖게된 츠네오는 조제에게 말을 건넨다. 「계란말이 맛있네요」아마 조제에게 있어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본 타인의 칭찬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참으로 그녀답다.
당연하지. 내가 만든건데.
그 솔직함에 츠네오는 매력을 느낀다. 그건 그가 지금까지 속해왔던 세계의 여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츠네오를 내심 좋아하면서도 삐뚤지게 표현할 줄 밖에 모르는 sp에게도, 본심은 자고 싶으면서도 단지 쉬워보이지 않기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카나에에게도 없었다. 츠네오는 조제를 보며 미소짓는다.
하지만 배탈날거야. 살모넬라균.
그것도 모르면서 대학은 뭐하러 다녀?
3.
츠네오는 조제에게 사강의 소설을 선물한다. 조제가 몇달, 몇년을 주인이 버려주기만을 바라며 손꼽아 기다렸을지 모를 것을, 츠네오는 며칠 헌책방을 뒤져 단돈 50엔에 구한다.
조제는 역시 어느 쓰레기통에서 주워왔을 블론드 가발을 뒤집어 쓴채 책을 읽는다. 츠네오는 웃는다.
츠네오는 조제에게 낮의 산책을 선물해 준다. 조제가 25년동안 그리워했던 것을, 23세의 츠네오는 단지 반나절 동안 유모차를 손보는 것으로 해내고 만다. 강변에서 유모차는 굴러떨어진다. 괜찮냐는 츠네오의 걱정섞인 물음에 그녀의 대답은 여전히 그녀답다.
너. 나를 죽일셈이야?
그 솔직함이 사랑스럽다. 풀 위에 누운 조제는 「저 하늘의 구름까지 방안으로 가져가고 싶어」라고 말한다. 그걸 바라보는 츠네오의 눈빛이 청년의 사랑인지, 아니면 모든 사물을 따듯하게 바라보는 소년의 투명한 마음인지는 불분명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시작하게 한 매개체가 '식'이었다면, 그걸 더 진전시키게 한 계기는 '성'이었다. 누구나 배고프면 먹고, 하고프면 한다. 식처럼 성도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SM 매니아 하루키군에 대해 낄낄거리던 두 사람 사이엔 불현듯 미묘한 성적 에너지의 기류가 흐른다. 츠네오는 조제의 손을 잡지만 조제는 고개를 돌린다. 그녀는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되기 위해선, 아직 츠네오가 넘어야 할 벽이 있다는 걸.
그때까지 그녀를 향한 츠네오의 마음엔 소년의 감정과 청년의 감정이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단순한 친구같은 관계에서는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은 것일지도 몰랐지만, 연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소년의 마음의 지층에 놓인 것은 '동정심'이다. 그것은 조제를 여인이 아닌 장애인으로 바라보는 시각 위에 기초하고 있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되기 위해선, 동등한 두 인격으로 만나 진정으로 교감하기 위해선, 그것은 죽어야만 했다.
벽은 생각보다 일찍, 바로 그 순간 찾아온다. 견학을 온 카나에를 맞아들이는 츠네오는 우유부단한 태도로 어쩔줄 몰라한다. 그 여린 마음이 오히려 조제에게 더 큰 상처를 준다. 카메라는 곧게 솟은 건강한 젊은 남녀의 다리 사이에 조제를 끼워넣는다. 일어서지 못한채로 올려다 보아야하는 조제는 복지사를 준비하는 카나에의 견학의 대상이 된다.
미안한 마음에 츠네오는 맛있는 음식을 사들고서 조제를 찾아간다. 그것이 과거처럼 자신과 조제를 다시 연결시켜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츠네오는 여전히 몰랐던 거다. 조제를 화나게 한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준비가 되지 않은 츠네오. 장애인을 연인으로 둘 각오를 다지지 않은 츠네오는 언젠가 조제에게 큰 상처를 줄 수 밖에 없었다. 그걸 아는 조제는 상처입지 않기위해 온몸의 힘을 다 쥐어 짜내며 반발한다.
할머니의 말에 츠네오는 비로소 문제의 윤곽을 잡는다. 너무 급작스럽게 인식하게 된 거대한 벽의 높이에 압도당한 츠네오는 돌아선다.
4.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츠네오는 '바로 그 하루키군'을 만난다. 그와 이야기 나누며 츠네오는 바보처럼 게걸스럽게 웃는다. 감정에 압도당해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면 그는 바보처럼 웃는다. 갑자기 애꿎은 하루키군을 쥐어패며 츠네오는 소리친다.
하필 왜 여기에 나타나냐!
애써 잊었는데. 다시 생각나잖아!
그건 하루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조제를 연상시킨 메타포에게, 자신의 마음 안에서 불쑥 다시 유모차를 타고 나타난 조제를 향해 한 말이었다.
복지과를 찾은 츠네오는 할머니의 죽음을 듣자 마자 조제를 찾아 간다. 조제를 찾아간 츠네오는 눈치 없게도 그녀의 아픈 부분들을 꼬치꼬치 캐묻는다. 의도는 조제를 걱정해주는 따뜻한 마음이었지만, 성숙치 못한 따뜻함은 조제에게 도리어 상처를 입힌다. 담담하게 대답하던 조제는 어느순간 폭발한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왜 쓰레기 버리는 것까지 참견해?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가
빨리 가
츠네오는 그말에 정말로 일어선다. 미묘한 부분이다. 평범한 연인의 삐진모습 같기도하고, 또는 자기보다 못한 것에 자선을 베풀던 꼬마 아이가 돌연 내뿜는 잔인한 가학성인듯도 하다.
그가 일어서려 등을 돌리는 순간, 조제의 표정은 허물어진다. 츠네오는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그런걸 가타부타 따지기에는 조제의 사랑이 커져있다. 조제는 힘껏 자신을 츠네오에게 부딪친다.
가!
가란다고 진짜로 갈 놈이라면 가버려!
가란 말이야!
조제의 진심이 츠네오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다. 츠네오는 다시 몸을 돌린다. 조제에게 키스를 한다. 그녀는 자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츠네오는 당황한다. 그 안의 소년은 아직 죽지 않았다. 조제를 여자가 아닌 장애인으로 보는. 「나는 가슴만지고 쓰레기 치워주는 그런 헨타이랑은 달라」하고 말해보지만, 조제의 반문은 정곡을 찌른다.
뭐가 다른데?
변태도 보통인도,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성욕은, 누군가와 몸의 온기를 나누고자 하는 욕구는 똑같다.
이불을 펴고 옷을 벗은 그녀의 몸은 25세 처녀의 성숙한 몸이라기보단 15세 소녀의 아직 다 피지 못한 풋풋함이다. 그녀의 몸을 바라보는 츠네오는 어린 여자아이의 몸을 더럽히는 듯한 죄책감을 느낀다. 복잡한 마음을 남긴채 둘의 몸은 하나가 된다.
그렇게해서 조제와 츠네오는 연인이 된다.
5.
둘은 수족관을 간다. 문은 닫혀있었다. 조제는 어째서 물고기가 물밖으로 나올 수 없는 거냐며 츠네오를 때린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 구애없이 자유로워 보이는 물고기들에게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자신만을 빼놓은채 행복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타인의 세계에도 각자 저마다의 삶의 무게는 있다는 것을.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심해의 수압 속에 살아온 조개는 짓눌리지 않기 위해 입을 열고 바깥을 바라볼 기회가 없었다. 자신에겐 너무나 솔직한 그녀였지만, 타인을 이해하는데엔 완벽하게 서툴렀다.
그 수압은 과거에도 존재해왔듯이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고, 미래에도 존재할 성질의 것이었다. 츠네오는 늘상 업고 다녀온 조제의 몸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진다. 그건 조제의 몸이 전하는 무게가 아니었다. 조제의 삶이, 그녀를 짓누르며 그녀의 성장을 방해한 그녀의 삶의 무게였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어린 츠네오는 그 무게를 지탱해낼 수 없었다. 조제를, 자신을, 그녀와 그의 행복을, 츠네오는 조용히 부모님과의 약속을 취소한다.
다시 조제에게로 돌아왔을 때, 조제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똥은 삶 그 자체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기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자듯, 누구나 똥을 싼다. 담담하게 똥을 싸는, 삶을 살아나가는 조제. 그 모습을 견뎌낼 수 없는 자신. 츠네오는 바보같이 웃는다. 무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을 때 그는 그렇게 한다. 조제에게 매달린채로 츠네오는 주체할 수 없이 운다. 두 사람의 사랑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서 조용히 죽는다.
타고남은 재와 같은 묵묵한 삶이 몇달 동안 계속된뒤, 둘은 담백한 이별을 맞이한다.
조제는 츠네오에게 SM책을 선물한다.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그녀가 츠네오에게 베풀어 줄 수 있었던 가장 큰 선물은 식과 성이었다. 조제는 자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츠네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카메라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저 조용히 바라본다.
등교를 위해 집을 나서는 평범한 일상의 아침처럼 츠네오는 떠난다. 그러나 그는 조제를 평생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이유는 여러가지였지만. 결국은 하나였다.
내가 도망쳤다.
그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 이상, 그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츠네오는 카나에에게로 돌아간다. 그가 과거에 속해있던 세계로. 츠네오는 갑자기 운다. 자신조차 어찌할 수 없는, 예상도 없이 터져나온 울음이었다. 어쩔 줄 몰라하며 너무나 절실하게 운다. 조제를 위해. 도망쳐버린 자신을 위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할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
-
- mamirine 2007/02/06 12:37
- Orange Dayz의 여운이 한껏 남아있는 가운데 이걸 보니까. 처음에는 으-내가 안좋아하는 분위기인데.. 하고 생각했는데, 잔잔한 가운데 두번 깜짝 놀라며 퍼뜩-퍼뜩- 뭔가 왔다.
한번은 '니가 왜 여기있냐. 겨우 잊었는데' 라고 화낼때, 또 한번은 담담하게 헤어지고 나와서 길거리에서 엉엉 울때.
둘다 전혀 그럴거라 생각도 못하고 있어서 댑따 깜짝 놀랐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온 노래가 좋았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석희의 유학시절 (0) | 2010.10.11 |
---|---|
단추수프 (0) | 2010.10.11 |
[포스터]눈물이 주룩주룩 (0) | 2010.10.11 |
Quruli - highway [영화 '조제,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0) | 2010.10.11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3] (0) | 2010.10.11 |
기묘한이야기-결혼시뮬레이터 (世にも奇妙な物語-結婚.. (0) | 2010.10.11 |
언제나 둘이서 (いつもふたりで, 2003) (0) | 2010.10.11 |
백야행 4화 캡쳐 (0) | 2010.10.11 |
백야행 (0) | 2010.10.11 |
'백야행(白夜行)' 주제가 - 시바사키 코우 (0) | 2010.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