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 디딤돌 신해철 인터뷰 1996-11-16 16:53 490 line
하도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어디서 퍼왔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그 긴 글을 두드려 올린 이의 정성도 그렇고 내용도 짜임이 있어 재미있네요.
한번 보세요.
이제 올립니다.
이장윤 (Slash )
[필독] 신해철의 인터뷰 기사 (내용 충실) 09/10 21:25 387 line
안녕하세요? Gums N' Noses의 Slash이어요.·˙·★~
이 인터뷰는 '디딤돌' 이라는 월간지에 실린 신해철님의 인터뷰 기사입니
다.나름대로 내용이 충실하다고 생각되어 올립니다. (디딤돌은 고교생을 위한
읽기자료임)
본 인터뷰에서 신해철의 음악적 견해와 넥스트의 앞으로의 방향, 표절에
관한 신해철의 견해, 한국 대중 음악계를 바라보는 신해철의 견해, 그리고 지
금의 자신이 있기까지의 이야기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글이 기니 갈무리 해서 보세요.
혹 이 글을 다른 게시판에 올리실 때는 갈무리 본 그대로를 올려 주시기
를 바랍니다. (제가 죽어라고 쳤음..400타지만...흐..힘들어..)
질문 : 넥스트의 두 번째 앨범을 2년만에야 들을수 있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
다.최초의 컨셉트 앨범으로 꼽히는 1집 <Home>만으론 당신은 만족하
지 못한것 같다. 앞의 앨범에서 가졌던 문제 의식을 '존재'라는 더
욱 추상적인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이 앨범을 통해 당
신이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무엇이었는가?
해철 : 넥스트의 두 번째 앨범을 준비하면서 구상했던 컨셉트는 세 개였다.
첫번째로 가졌던 생각은 시적인 뉘앙스를 가진 언어가 아닌 철지히 일
상적인 언어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도전해 보고 싶었다.
두번째는 나의 성장 과정 속에 스며들어 있는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문제
를 직설적으로 토로해보는 작업이었고, 마지막 구상은 6~70년대 이탈리
아 프로그레시브 록에서 집중적으로 시도 되었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문제를 음악으로 풀어 보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해 보고 싶었던 것은 두번째로 언급한 주제였다. 내
가 성장하면서 수없이 겪어야 했던 선택과 혼돈의 구체적인 궤적을 정
면으로 돌파해 보고 싶었다. 나는 68년생인데, 나와 같은 또래면 온몸으
로 이해하겠지만, 이들은 갈팡질팡하는 교육 정책 때문에 엄청난 고통
을 겪어야 했던 세대이다. 하다 못해 두발과 교복같은 문제까지 길렀다,
깍았다, 입었다, 벗었다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십대
가 봉착해야 하는 운명이지만,우리의 십대 마지막엔 대학이라는 괴물
이 버티고 있었다. 아무도 미래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한 반에서 고작
스무명도 가지 못하는 대학에 가서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나와 이 땅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19살은 삶의 어두운 분기점
이었고 이 비관적인 현실을 비판해 보고 싶었다.
질문 : 오로지 달콤한 구애와 이별의 슬픔으로 범벅된 한국 대중 음악의 상황
에서 그것을 핑크플로이드의 <벽,the wall> 처럼 하나의 앨버에서 집중
적으로 추구한다면 그것만으로 의미 있는 대단한 시도가 아닌가?
해철 : 음반의 사전 심의가 여전히 대중 음악의 상상력을 목조르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사전 심의 제도의 철폐를 위해서
외롭게 싸우고 있는 정태춘 형에게 마음 속으로밖에 박수를 보낼 수 없
는 내 자신은 아직 왜소하다 (주:정태춘과 박은옥씨는 음반의 사전 심의
를 거부하고 음반을 제작해서 발표했다. 즉 현행법 상으로는 불법 음반이
라는 소리..)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펼치기 위해선 제도적 질서에 대해
전쟁을 선포해야 하는데.....하지만 세번째 주제, 즉 이번 앨범의 타이틀
이 된 '존재,The Being' 에 대한 탐구도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고, 지금
내가 통과해야 할 숲인 것이다. 두 번째 주제가 무산된 것에 대해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아 달라.내 예상으론 이 사전 심의 제도는 앞으로 몇 년
안에 결판이 난다. (주:신해철님이 사전 심의 제도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
아, 그가 쓰고자 했던 가사는 '교실 이데아' 보다 더욱 직설적인 것이
리라 생각된다.)
질문 : 당신을 무수한 '스타'의 늪에서 '아티스트'로 가는 험난한 좁은 문 앞에
서게 만든 동력은 사랑에 대한 시시껄렁한 동어 반복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구성하는 '존재' 의 뿌리와 배경에 대해 성찰하려는 집
요한 노력이었다. 가령 앨범 <Myself> 에서의 <재즈 카페>나 <Home>에
서의 <Turn Off The TV>같은 데서 파고 들었떤 산업사회의 도시 문명,
<아버지와 나> 에서처럼 아버지로 표상되는 가족 관계, 그리고 '음악'만
이 자신의 밥줄이자 구원의 통로인 바로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진
지하고 따뜻한 질문이 그렇다. 이러한 음악적 태도는 평가 이전에 한
국 대중 음악에 있어서 소중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신이 생각할 때 한국
대중 음악에서 당신이 차지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해철 : 나는 내 자신을 '변방'에서 '서양 음악'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
고 또 그렇게 말해 왔다. 이 말 자체는 웬지 기분 나쁘게 들릴 것이다.
젊은 놈이 고작 서구의 꽁무니나 쫓아 다닌단 말인가 하고. 그러나 좀더
냉정하고 현실을 바라보자.
서양 음악은 내가 말을 배우는 순간부터 나를 지배해 왔다. 그것이 우
리의 문화 상황이다.이순신 장군 영화는 단체 관람 시키면서 공짜인
국립 국장의 국악 공연은 한 번도 데려가지 않는 것이 우리 교육의 실상
아닌가? 나와 나의 세대는 서양 음악을 통해 음악을 익혔고 앞으로도 그
질서는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나의 임무는 명확하다. 서양 음악을 제대로 흡수하고 소화하는
것. 그리고 그 바탕 위에 나의 음악 언어를 완성시키는 일이다.
나는 발라드와 댄스 뮤직은 물론 랩과 메틀, 그리고 아트 록에 이르기까
지 서양 음악을 섭렵하는 중이다. 몇몇 사람은 나의 음악이 너무 서양
적이지 않냐고 반문한다.
생각해 보자. 바흐부터 바르톡까지 이들의 음악만을 레퍼토리로 삼는 정
경화만이 국가의 자랑인가? 우리 대중 음악계엔 서양의 록 음악에 우리
의 국악을 접목 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 하는 김수철 형이 있다.
그의 끈질긴 자세를 나는 존경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나의 몫은 아니
며 국악에 대한 접근은 조급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사실 이번 앨범에
서도 국악적인 요소의 고용을 고려했지만 최종 단계에서 결국 빼버리고
말았다.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나 할까?
이쯤 되면 우리 대중 음악에서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분명해진다. 축
구로 비유하자면 나는 끊임없이 빈 곳을 채워 가는 링커가 되고 싶다.
축구장엔 골을 도맡아 넣고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 스트라이커가
있는가 하면 축구라는 드라마의 밸런스를 잡아가는 링커진이 있으며 묵묵
히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풀백도 있다. 폭발적인 히트곡을 터뜨리는 스타
가 스트라이커라면 나같은 싱어송 라이터나 셀프 프로듀서는 링커일 것이
고 세션맨은 풀백에 해당할 것이다. 이 모든 포저션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룰 때 그 팀, 혹은 그 나라의 음악 문화는 비약을 한다.
질문 : 당신은 이미 몇 손 꼽는 '스타' 가 아닌가?
해철 : 그것은 우리 대중 음악이 아직 동네 축구이기 때문이지 내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나는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이다. 데뷔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새로운 표현을 하기 위해 필요했던 악기를 살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하늘의도움이라고 생각한다. 브라운 관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데도 나의 앨범이 많이 팔리는 것은 쉽게 대중과 영
합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팬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싶
다.
질문 : 다시 음악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지금 여기의 대중 음윽의 장르 구도는
정통적으로 강세를 보여 왔던 트로트 음악이 퇴조하는 가운데 발라드와
댄스 뮤직이라는 두 축으로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 두 장르는 데뷔
초기에 당신에게 성공을 안겨 준 장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룹 넥스트
를 통해 당신은 우리 실정에 맞이 않는 것으로 여겨졌던 아트 록의 영
역에 도전했고 또 성공을 거두었다. 당신의 음악이 서양 음악을 추구한
다면 궁극적으로 당신이 지향하는 장르는 어떤 것인가?
해철 : 나는 지금 단계의 한국에서 장르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다. 왜냐하면 하나의 장르에 영혼을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매우 척박
하기 때문이다. 뭐 하나가 시쳇말로 뜨면 우르르 몰려 가는 천민적인
상황에서 장르를 얘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신촌 블루스와
같이 세상이 어찌되건 자신의 음악의 성숙만을 추구하는 참으로 귀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장르는 계보학적 질서가 파괴 되어있다. 서구의 경우 가령 70
년대 말을 휩쓸었던 디스코만 하더라도 몇년 뒤 선풍이 시들면서 곧 바
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결합하면서 자연스럽게
뉴웨이브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한 번 팔아먹고 버리
는 차원으로 장르를 인식하기 때문에 그 이후의 자양분으로 남을 여지
가 거의 없는 것이다.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넥스트의 음악이 이런 맥락
에서 한국적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엔 메틀, 발라드, 아트 록 등등이
혼재되어 있기 ㎖문이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나 즐기는 사람이나 모두에
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장르의 본 정신을 사고할 줄 아는 풍토의 조
성이다. 이런 풍토 위에서 고급 축구는 가능해지고 또한 쉽게 몰락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잘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일본 대중 음악을 무시했는데 요즘 생각이 바뀌
었다. 나의 인식을 전화시키게 한 요인은 외래의 문화를 수용하는 일본
인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재즈건 아트록이건 자기들 땅에 상륙한 외래
문화를 꼭꼭 씹어서 자신의 감각에 맞게 재구성한다. 그들은 이와 같은
다양성의 토대 위에서 자신의 음악을 풍요롭게 펼쳐 나갈 수 있는 환
경을 계속 만들어 가는 것이다.
질문 : 그렇다면 언어의 문제는 어떤가? 대중 음악에 있어서 언어, 즉 가사의
문제는 선율과 리듬만큼이나 비중이 크다. 특히 당신은 앞에서도 언급되
었지만, 앨범을 발표할 때 마다 새로운 문제 의식을 제시해온 드문 아티
스트가 아닌가? 그리고 영어로 된 가사가 늘어나는 추세에 대해서 어떻
게 생각하는가? 외국어 가사는 저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
다. 국제화 혹은 세계 시장 진출이라는 명분은 설득력이 없다. 그것은
우리의 음악을 수출할 때 얼마든지 외국어 버전을 만들어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랩이 부상하기 직전에 당신은 이미 데뷔 앨범의 B 면
의 <안녕>이라는 곡에서 의미심장한 랩을 구사한바 있는데 즉, 'You
Didn't Want a flower, you wanted honey. You didn't Want a lover,
you wanted amoney. You've been telling a lie, I just wanna say
"Good-Bye" 라는 대목 말이다. 이것이 영어로 불려진 것은 아쉬운 일이
다. 이 번 앨범에서도 나레이션 부분에서 영어가 가끔 보이던데?
해철 : 결국 예술가로서 언어를 다루는 역량의 문제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어떤
이미지를 압축하여야 할때 우리 말이 노래 가사로선 많은 고통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영어의 각운 같은 기법도 구사하기 힘들고, 하지만 더욱
힘든 것은 대중 음악에 대해 수용자들이 품고 있는 선입관이 벽이다.조
금만 관념적인 것을 형상화 하면 어린 대중들은 어렵다고 하고 식자층은
내심 '유행가가 무슨.....되게 아는 척하네' 하는 투로 경원하고 무시하
는 경향이 있다. 누구나가 고민하고 있는 삶의 본질적인 개념에 대해서
노래했다고 해서 나를 지성파 가수 운운하는 것도 낯 뜨거운 일이다.
언어의 문제는 결국 음악에 대한 아티스트와 대중의 태도가 서로 맞아떨
어지는 바로 그 시점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본다. 그리고 아
예 영어로 노래하는 것은 특히 메틀 음악에서 그런 경우가 번번한데,
나 역시 전적으로 반대한다. 그것은 몸은 한국에 있으면서 머리는 메탈
리카와 경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나라고 해서 이 딜레마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서양에 뿌리를
둔 음악의 비트와 우리 말의 분절 구조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
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적한 <안녕>의 랩만 해도 처음엔 한국어였다.
그런데 그것이 '인천 앞바다가 사이다라도...' 나 남대문 시장에서 '골
라! 골라!' 하는 것보다 더 어색하게 들렸던 것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영
어로 가 버렸다. 하지만 바로 직후에 서태지가 등장해서 한국어로도
랩이 훌륭하게 진술될 수 있는 것을 보여 주지 않았는가? 이렇게 발전
해 나가는 것이다.
질문 : 너무나 상투적인 질문이지만 당신이 어릴 ㎖ 부터 걸어 왔던 음악적 경로
가 궁금하다.그리고 당신이 영향받은 음악과 아티스트는 누구인가?
해철 : 나의 성장 과정도 너무나 상투적인 공식이다. 아주 어릴 때 부터 어머니
의 강요(?)로 피아노를 배웠고 국민학교에서는 학교 밴드부에서 클라리넷
을 불었는데.....싫었다. 재능도 거의 없었고 피아노 레슨 선생님은 어머
니에게 "얘는 음악적으로 별로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고 조심스럽게
말할 정도였고, 고교 때 밴드 코치도 "정열은 있으나,재능이 없는 예술가
가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인간이다." 라면서 내가 얼마나 재능이 없는지
를 은근히 암시했을 정도니까. 아버지마저도 내가 대학에 들어간 뒤 본격
적으로 음악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음악 그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이 아
니라 "니가 재능이 없어서..." 라고 내 가슴에 못을 박았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는 디스코 선풍 속에서 동요와 결별했고 중학교에
가서는 딥 퍼플이나 레드 제플린 같은 하드 록 밴드와 핑크 플로이드 같
은 음악에 매료되었다. 고등학교 때 밴드에서 제일 먼저 연주한 것도 딥
퍼플의 <Smoke On The Water> (주: 이 곡은 록 기타의 교과서라 불리우는
곡이다.)였으니 이 정도면 거의 공식이 아닌가?
웃기는 말같지만 나는 제도 교육의 모범생 축에 끼었다. 집이 어려웠던
고1 땐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학교를 다니기가 힘들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아마추어 밴드 활동도 부모님은 승인은 하지 않았지만 이해는
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대학 (서강대 철학과)에 진학한 뒤 프로가 되겠다
는 선언을 하자 그야말로 집안은 발칵 뒤집혔고 나는 또 공식대로 가출
을 감행해서 어거지로 승낙을 받은 기억이 새롭다.
나의 음악에 영향을 미친 아티스트? 단연코 조용필 선배다. 그가 보여준
음악적 뚝심, 단 한순간도 안주하지 않는 자세, 대중을 결코 배신해서는
안 된다는 신조는 내가 영원히 품고 가야 될 좌우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를 그냥 뛰어난 스타 정도로 보기 쉬운데, 그건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내가 음악을 훈련할 때 드럼 머신이나 멀티 채널이니 그리고 새로운
음향 테크닉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가 모두 문을 열어 놓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질문 : 이번 질문은 우울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바로 요즘 꼬리를 물고 일어나
는 표절에 대한 문제이다. 표절은 단순한 양심 불량의 문제가 아니라 예
술적 범죄이며 애정으로 가득 찬 수용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더구나 표
절의 많은 부분이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일본 대중 음악이
라는 데서 그 충격은 크다. 당신이 그 어떤 추문에 연루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작곡자이자 또 프로듀서인 당신은 이 표절에 대해 어
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해철 : 한국 대중 음악에서의 표절의 문제는 몇몇 개인의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
라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문제이다. 이것의 시원은 일본의 엔까를 받아들
이면서 우리 대중 음악사가 시작된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
방에 급급했던 현상은 일제 시대가 끝나고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한 뒤에
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두 음계 안에서 움직이는 서양의 대중
음악에서도 듣기 좋고 아름다운 코드는 비틀즈가 주름잡던 1960 년대
에 이미 갈 데 까지 갔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가 점점 어려
워진다.
지금 우리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가 않다. 오로지 생존과 성공의 강박
관념에 시달리기 때문에 한 곡을 가지고 다섯 명이 표절하는 경우까지
있는 것으로 안다. 특히 일본의 문제는 심각하다. 일본 음악이 개방 되는
것을 가정해 보라. 기술과 자본 모든 면에서 뒤떨어져 있는 우리가 그들
의 음악까지 베낀다면 문화적 종속은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국가
적 망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단 하나 희망이 있다면 90년대 들어서
대중들이 (물론 매니아 층이지만) 표절을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컴퓨터 통신 같은 자발적인 커뮤티케이션 망을 통해 쿤제 의식의 공유
를 넓혀 가고 있다는 것이다.
질문 : 이른바 하우스 뮤직의 붐이 일면서 시퀀스를 통한 샘플링 기법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자신의 선율을 탕생시키기 위해 땀방울을 흘리기
보다는 간편하게 기존의 악곡을 (그것도 대부분이 외국것인) 그대로 가져
다가 사용할 수 있는 이 기법 자체가 이미 표절 사태를 암시하는 것이 아
닌가?
해철 : 샘플러라는 탁월한 악기가 전위적인 음악 실험의 도구가 아니라 값싸게
표절할 수 있는 기계로 전락한 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박자에
따라 두마디다, 네마디다 하는 기준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적
인 표절 말고 아예 통째로 베낀 것만 연간 백 곡이 넘을 것이다. 이런
노래들만이라도 철저히 밝혀 내야 한다. 샘플링 기법을 둘러싼 문제도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해결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원곡을
만든 이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합법적으로 하면 된다. 사용할
권리를 샀는데 계약 사회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
것은 저작권을 침해하는 도둑질에 불과하다.(주:저의 의견과 같네요. 작
곡료 내지 않고 남의 곡에서 샘플링 해온 경우도 모두 표절입니다. 예
전의 바닐라 아이스와 해머가 그 좋은 예이지요..우리 나라의 경우 무단
으로 마구 샘플링 해오고 있습니다.)
질문 : 여태까지 문화 생산자로서의 당신과 당신의 음악에 대해서 얘기해 왔다.
마지막 질문은 그것의 소비자인 대중에 대한 문제로 돌려 보자. 대중은
대중 문화의 중추를 이루는 주역이지만 부정적인 측면과 긍적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양면적인 존재이다. 대중의 기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며 그것을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당신과 같은 생산자와 대중이라는
소비자가 함께 성장해 갈 때만이 우리의 대중 음악 문화가 보다 소망스런
것으로 나아갈 것이다. 대중의 문화 향유 수준의 향상을 가로 막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해철 :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합리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 동안
이른바 스타에 대한 십대들의 동경은 예술가로서의 인정이라기 보다는 보
이(걸) 프렌드 대리 만족의 수준에 머물러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데뷔해서 방송국을 들락거릴 무렵 선배들은 한결같이 '이 판은 똑똑
한 척하면 죽는다' 라고 충고해 주었다 다시 말해 인간적인 허점을 보여
야 대중들이 좋아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성향은 조금씩이나마 퇴조하는 기미가 보이고 있고, 아티
스트들의 입장을 완고하게 고수하는 것을 지지하는 대중들이 늘어나고 있
다. 이런 대중들 땜에 지금 내가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제 대중 음악가 들도 어떻게든 대중에 영합하려기보다는 뚜렷한 자기 주
장을 펼쳐야 할 때라고 본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낙관적이지는 않다. 거리의 패션만 보라. 하나가 유행
하면 자기의 개성을 팽개치고 너도 나도 그 쪽으로 달려가지 않는가? 순
응과 주입만을 가르치는 교육제도가 존속하는 한 주류 문화에 일방적으
로 몸을 맡기는 문화적 획일성이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
-=-=-=-=-=-=-=-=-=-=-=-=-=-=-=-=-=-=-=-=-=-=-=-=-=-=-=-=-
대담 : 강헌 (음악 평론가)
두들긴이 : 이장윤 (Slash) (음악 애호가)
안녕히 계세요. Gums N' Noses는 Guns N' Roses의유사상표임을 밝힙니다....
제 목 : 새로운 기타의 귀재 영입, 이제 새출발 _
완벽한 진용을 갖춘 넥스트 멤버들
<이수용。김세황。이동규。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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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됐다!" 그룹 넥스트가 완벽한 진용을 갖추고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다.
지난 7월 넥스트는 기존 멤버였던 정기송이 탈퇴하고 드럼 이수용,
기타 임창수를 영입했다. 그러나 8월초 임창수가 개인사정으로
물러나면서 기타리스트에 공백이 생겼다.
결국 신해철은 오래전부터 교섭을 해오던 헤비메틀 밴드 '다운타운'의
김세황을 스카웃하는 데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앨범준비에 돌입했다.
방송활동을 중단한 채 연습실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넥스트 멤버들을
만났다.
▲ 요즘 근황은 어떠한가.
'존재' 앨범 '파트1' 부분녹음을 다시 하고 있다. 새로운 멤버들이
가세했고, 부족했다고 느꼈던 기타, 드럼 분야의 연주 믹싱작업을
하는 중이다. 현재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는데 매우 흡족하다.
재녹음전 앨범에 비해 기타(김세황) 사운드가 다른 음에 비해
두드러짐을 느낄 수 있다.
▲ 8월 콘서트를 연기한 이유는.
라이브는 앨범에서와 흡사한 사운드와 노래를 들려줘야 하는데
인적구성이나 연습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게다가 원래 계획도
'파트2'를 완성하고 나서 콘서트를 가지려 했던 것이어서 오히려
공연을 연기한 것이 넥스트나 팬들에게도 잘된 일이라고 믿는다.
▲ 새로 영입한 김세황의 영입 동기는.
김세황군은 원래 올초부터 영입하려 했던 인물이었으나, 그룹
'다운타운'에서 활동을 하고 있던 상태여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의 연주실력은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 같이 일해보자고 제의했을
정도이며,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라고 평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나다.
그의 진가는 재녹음해서 발매예정인 '파트1' 앨범을 들어보면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존재' 앨범과 마찬가지로 메틀사운드가 강화된 '서태지3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태지가 원래 메틀음악을 했었기 때문에 언젠간 본격적인 메틀음악을
선보이리라 예상했었다. 평키나 재즈 등의 음악을 먼저 선보인 후
메틀을 했으면 더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앨범이라고 본다.
▲ '파트2'는 어떤 풍이 될 것인가.
아직 자세한 것을 밝힌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좀더 난해하고 비트가
강한 음악이 될 것이다. '파트1'은 60채널을 사용했지만 '파트2'는
무려 80채널을 사용할 예정이며, 나와 이동규, 김세황이 보컬을
맡으며 이수용은 코러스를 담당하게 된다.
▲ 음악평론가들이 넥스트의 '존재' 앨범에 대해 국찬을 하고 있는데
우선 부족함이 많은 넥스트에 따스한 충고를 해주는 것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음악을 하는 것 뿐이며,
대중에 영합하는 음악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 앞으로의 계획은.
우선 '파트2'의 완성이 급선무로 11월말경 발매할 예정이다. 그리고
95년초부터 전국투어 콘서트를 가지면서 변신된 넥스트의 진면목을
보여주겠다.
★ 김세황 ─ "재즈록 하고 싶다"
▼ 현재 심경은.
예전에 넥스트 공연을 보면서 나도 저기에서 활동할 수 있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막상 정기송 형의 자리에 들어오게 돼 너무 기쁘다.
▼ 언제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나.
어머니가 클래식 기타를 연주했던 영향으로 6살때부터 기타를 만졌다.
▼ 넥스트에 들어오기 전의 활동은.
91년부터 언더그라운드 메틀밴드에서 활동해왔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간, 무척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 하고 싶은 음악이 있다면.
퓨전재즈와 베이스, 드럼이 가미된 '재즈록'을 해보고 싶다.
─ TV 저널 ─
1993년 12월 뮤직랜드와 김세황의 인터뷰
- 기타를 언제부터 연주하셨지요?
클래식 기타리스트 셨던 어머니께서 저를 가지셨을때 부터
기타와 접해 있었다고 할수있어요. 태어난 이후에도 매일같이
듣고 자랐던 음악도 그렇고 어쨌든 기타뿐만 아니라 음악적
환경에서 커왔어요. 의미를 두자면 국민학교 4학년때 백화점
에서 샀던 전기 기타가 최초로 제 소유의 연습할만한 기타였고
시작은 그때 부터라고 해두죠.
- 그래도, 처음부터 음악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텐데....
아니예요. 저는 어려서부터 외교관이신 아버님 밑에서 엄격하게
커왔기 때문에 정말로 자유로운 생활을 원했고, 음악을 하면
그렇게 될거라고 믿어 왔습니다. 중3때 대구에서 외국인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다운비트라는 재즈 동우회에서 3개월마다 정기
연주회를 했어요. 아마도 그때부터 좀 더 구체화 되지 않았을까?
- 연주시 가장 중점을 두는 사항은?
저 뿐만 아니라 팀 모두가 록을 하지만 세련된 음악을 하기를
원하지요. 그래서 저는 느낌과 센스를 중요하게 여겨요. 거기에
맛도 있으면 더 좋겠죠.
- 기타리스트로서 팀과 화합하는 방법은?
저는 다운타운 이전에 인스트루멘탈 밴드에 있었어요. (재즈록과
퓨전 음악을 한던 밴드였음-쉐이커) 그때는 저의 모든 테크닉이
최고에 달해 있을때였는데 이 밴드에 가입하게된 이후에는
리듬백킹도 해야되고.... 나름대로 문제는 있었죠.
그러나, 서로 이해해주고 서로 뭉쳐다니며 많은것도 경험해보고
직접 부딛쳐보니 이제는 다운타운 없이는 못살지요. 멤버중 제가
제일 막내라서 모두들 친동생처럼 참 잘해주세요. 불편한점(?)도
있지만.....
- 팀의 단점이 있다면?
경험미숙이랄까? 아직 많은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있어요.
블랙신드롬 같은 밴드를 볼때는 더 그렇죠. 앞으로 열심히 할께요.
- 좋아하는 뮤지션이 있다면?
먼저 저는 한국사람이라는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한국 사람부터
소개하면, 화요일이라는 밴드의 기타리스트 유석준씨를 좋아합니다
예전에 미국USC대학교때 스티브 모스밴드의 오프닝을 하시던 분이
에요. 정말 너무도 대단한 분이예요. 정말 너무도 대단한 분이예요.
한분 더 말하자면 박청귀씨 그리고, 지미 헨드릭스, 리 리트너,
반 헤일런(쉐이커가 가장 좋아하는기타리스트 중의 하나이다-껴들기)
그리고, 머라이어 캐리...
- 작곡은 어떤방식으로?
악상이 떠올를때 머리속에 있는 기본적 진행이나 화성을 바탕으로
곡의 전체적인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악보를 그릴수 있는
상황이 될때까지 잊어 버리지 않도록 입으로 흥얼 거리죠. 또, 작곡
은 반드시 피아노로 합니다. 피아노 아니면 신디사이저라도....
기타로는 하지 않습니다.
- 이번 앨범에서 표현하고자 한것은?
내용적으로 볼때는 침체된 한국의 록과 록커들에게 힘을 내자라는
내용이 많고 저는 센스와 필링으로서 그걸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MIDI나 컴퓨터 뮤직에 대해?
팀 내에선 제가 키보드까지 담당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른 멤버들도 그걸 원하고, 싫건 좋건 피아노 레슨을 받아왔던
경력도 있고해서 이번 앨범의 거의 모든 곡에 시퀸싱 작업으로
저의 기타 아닌 또 다른 파트로 들어가 있습니다.
- 김세황의 기타와 픽업, 스트링에 대해서....
(김세황의 인터뷰 내용중...)
사람들이 저에게 그것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합니다. 왜 스테인 버거를
사용하는지를요. 헤드도 없고 서스테인도 떨어지는등 단점을 따지면
쓸수 없지만 저는 이용 범위가 다양한 기타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EMG85를 사용하는 이유도 액티브 픽업이라는 기계적 소리에
작고 얇은 보디와 플라스틱 네크가 조화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스트링은 스테인 버거의 힘든점 중에 하나인데 선택의 폭이 너무
적다는 거죠. 스테인 버거 전용을 사용해야 하는데 국내엔 다다리오와
GHS의 0.09게이지 밖에 나와있지 않아요. 아시다시피 스테인버거는
헤드가 없기 때문에 텐션이 약한데 저는 0.10게이지를 구해서 사용했
습니다.
이현종 (hjlee )
[상은/기사]ROCKIT 7월호 김세황인터뷰.1 1997-07-24 22:35 208 line
"ROCKIT 7월호- featured guitarist - 넥스트 김세황"
우리 나라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락 밴드 넥스트의 기타리스트
김세황. 만약 당신이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그가 현재 국내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기타리스트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가 필(feel)
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단 '잘 친다'는 사실 역시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락 기타 유향의 첨단을 달리는 그의 기타와 각종 장비, 현란하면서도 센스
있는 연주, 그리고 화려한 액션과 프로페셔널한 무대 매너 등 김세황은 그
의 팬이고 아니고를 떠나 락 기타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관심
을 가져볼 만한 기타리스트다. 그리고 이 기사는 '우리들의 오빠'로서가 아
닌 '기타리스트 김세황'과의 인터뷰이다.
김세황이 처음 기타를 잡은 건 국민학교 2학년 때. 그의 어머니가 클래식
기타리스트였기에 처음 잡아 본 기타는 어머니의 야마하 클래식 기타였다.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처음 일렉트릭 기타를 치게 된 계기는 국
민학교 4학년 때 tv에서 우연히 보게 된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재방
송 프로그램이었다. 인터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여기까지는 인터뷰 녹
음 테입이 지워지는 바람에 내용을 그대로 옮길 수가 없었다.)
김: 그 때 ,참 재밌는 게 뭐냐면요. 그 때 그 방송을 보고 기타리스트를 꿈
꾼 사람이 되게 많더라구요. 폴 길버트(Paul Gilbert)도 그렇고, 뭐, 하여튼 무
진장 많더라구요. 그 때가 제가 국민학교 4학년 때예요.
R: 그러면 한국에 다시 오셨을 때 미국하고는 환경이 많이 달랐을 거 아녜
요. 음악 접하기도 힘들고......
김:뭐, 아무 생각 없었죠. 일단 전 오자마자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일
단 말을 모르니까 도저히 적응이 안 되더라구요. 그래서 대구에 있는 외국인
학교를 다녔어요. 근데 거기서도 그냥 학교 다니고 적응하느라고 정신이 없
어서 뭐 음악을 했다 이런 건 하나도 없구요.순전히 얘기하면 학교에서는 그
냥 가방 메고 다니고 집에 와서 그냥 기타를 친 거죠. 그냥 취미 식이죠.
R: 그 때 좋아하던 음악은 어떤 게 있나요?
김: 그 때 좋아하던 음악이요? 아.. 대구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정말로 할
일이 없었거든요. 진짜... 뭐라 그러지.... 뭐, 대구에서는 놀 게 진짜 없어요.
(웃음)그래서 용돈 받으면 그냥 판 사고 음악 듣고 이랬는데 그 때 음악 중
에 제일 좋았던 게... 아무리 봐도... 토토(TOTO)7집하고(THE SEVENTH
ONE). 토토 7집하고... 또 뭘 좋아했었지? ...
아, 예스(YES)의 BIG Generator요.
R: 트레버 래빈(Trevor Rabin-당시 예스의 기타리스트)이 한 거요?
김: 네, 되게 좋아했어요.
R: 혹시 고등학교 시절에 송설에서 만들던 얇은 기타 잡지 같은 거 보지
않았나요?
김:... 아! 봤어요,
R: 거기에 독자 엽서 보내신 적 있으시죠?
김:예, 옛날에 보냈어요. 진짜예요.,.(웃음)
R: 그 잡지에 'ONLY GUITAR KIDS'라는 코너가 있는데 그게 그냥
'ONLY'가 아니라 'ONLY FOR GUITAR KIDS'라고 정정해 주신 내용
이었죠.
김:(웃음) 네 ... 그 때가.... 맞아요. 재밌네요. 어떻게 그걸 아세요?
R: 얼마 전에 우연히 친구 집에서 봤어요. 보는데 독자 엽서란에 갑자
기 김세황이라는 이름이...
김:그게요. 대구에 '서울 음향사'란 데가 있거든요. 근데 거기서 기타도
팔고 레코드도 팔고 막 그러는데... 거기 그게 있더라구요. 그래서 열심히
봤죠. (웃음)쪽팔린데요...
R: 그러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다시 서울로 오신 거예요?
김:아, 고등학교 2학년 말에 서울로 온 거예요. 도저히 대구에선 답답해
서 죽겠어서 집에서 졸라가지고 제발 좀 전학 좀 시켜달라구... 그런거죠.
R: 처음 밴드하신 건 언제죠?
김: 처음 밴드한 거요? 어... 완전히 아마추어 밴드, 고등학교 때 밴드는
제가 대구에 있으면서 서울에... 지금은 삐삐롱스타킹에서 노래 부르는 고
구마랑 토이의 유희열씨랑 그리고 이한별이란 분이 있어요, 노래 부르는
친군데요. 그 친구들이랑 같이 고1 때부터 파고다 아마추어 밴드를 했던
게 최초구요.
R: 고 1때 대구에 다 같이 계셨던 거예요? 그 분들이랑?
김:아니죠. 저만 대구에 있었거든요. 근데... 열심히 편지 보내고 ... 그러
니까 서울에서 중학교 다닐 때 제일 친하던 친구의 고등학교 때 짝이 노
래부르는 친구였어요. 어떻게 그 친구랑 저랑 연결을 해 줬는데 음악 듣
는 것도 너무 서로 비슷하고 뜻도 잘 맞고 그래서 환상의 컴비였죠.(웃음)
그 때 최초로 한 팀이 '아카시아'라는 밴드였어요.
R: 고등학교 때요?
김:예... 그래서 공연도 참 많이 하고...
R: 그 때 어떤 음악 하셨어요?
김:어.. 지금 걸이 하는 음악 같은 거였어요. 그러니까 락커빌리 같은 거
였는데요. 걸처럼 이렇게 막 세련된 사운드가 아니었구요. 그 때는 뭐 그냥
무조건 돌리고 보면 (웃음)다 되는 , 그런 거였죠,. 뭐..
R: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밴드하신 건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김: 그게 다운타운이죠. 아, 그 전에는요...
R: 그 전에 무슨 연주곡 위주의 밴드를 하셨다고...
김: 예, 잠깐 했는데요... 근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밴드라고 할 수가 없는
데... 연습은 진짜 열심히 했어요. 그 때 저희 삼촌이 카페를 하셔서 카페
끝나면 밤새도록 거기서 합주를 했거든요. 3인조 인스트루먼틀 밴드였는
데요, 저랑 베이스, 그리고 드럼, 이렇게 있구요... 그래서 주로 뭐 연주곡
들 이거 저거... 뭐 그런 거 주로 연습하는데... 공연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판은 당연히 내 본적도 없는 그냥 아마추어 밴드라고 봐야죠, 근데
되게 즐거웠어요. 아, 그 연주 밴드를 할 때는 나름대로 제가 그 당시에
는 .....락이나 이런 거보다 퓨전에 굉장히 욕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 당
시에는 제일 좋아하던 밴드기 스파이로 자이라(SPYRO GYRA)였는데...
근데 정한종씨를 만난 그 날부터 완전히 인생이 바뀌었죠. 정한종씨는 전
에 '전사'라는 팀을 했었고, 저는 이제 '아, 이 분이 그 분이구나....'제 친구
의 선배분이라서요....그런 식으로 소개를 받았는데... 뭐 '재밌는 락을 해
보지 않겠니?' ... 그날 이후로 다시는 못 돌아갈.....(웃음)
R: 그 때 다운타운을 처음 접하게 된 거죠?
김: 그렇죠.
R: 그 때가...
김: 91년 8월이요.
R: 앨범은 93년에 나왔죠?
김: 93년 11월달에 나왔죠.
R: 그 때까지는 계속 공연하셨고요?
김: 공연하고 데모 테잎 만들고 뿌리고 퇴짜맞고 뿌리고 퇴짜맞고 그
러니까.. 뭐... 난리 블루스도 아니었어요. (웃음)
R: 다운타운이 추구하던 음악이 어떤 식이었죠? 뭔가 댄스가 가미된락...
전에 인터뷰 하신 거 보면 재닛 잭슨의 'Black cat'같은 음악을 하고 싶다고....
김: 아..네. 블랙 캣도 했었고요. 근데 다운타운 때 음악은 지금 와서 제
가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좀 힘들고요... 그 당시 느낌 대로. 그 당시의 우리
나라의 음악 상황을 배경으로 생각해 봤을 때는 우리 나라 가요나 락이 그
런 게 있었어요. 잘 아시다시피 다들 한 편으로 천편일률적인 부분이 너무
많았어요. 저 같은 경우는 너무 안타까왔던 게... 분명히 이런 포맷의 이런
음악 연주자들이면 꼭 이런 것만 할 필요도 없고 이런 것을 한 번 해도 되
는데, 왜 안타깝게 발라드를 하는 사람들은 발라드를 많이 하고 락하는 사
람들은 맨날 '죽어라, 부셔라', 그것만 해야 하는가..... 분명히 죽어라 부셔라
하는 사람들도 발라드 같은 걸 할 수 있고... 제대로. 그리고 발라드 하는사
람들도 '죽어라부셔라' 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거얘요. 그래서 나름대로
시도를 해봤던 게 사실은 그거였어요. 그러니까 그 때는 짬뽕 음악이라는게
별로 없었던 시대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없었잖아요. 짬뽕음악을 한 번 해
보고 싶다라는 거였죠. 왜 중국집 보면 먹다 남은 거 다 이렇게 섞어가지구
고추장 딱 풀면 짬뽕 되잖아요(웃음). 그런 거 같아요.
R: 앨범 나오기 전에, 그러니까 92년, 말에 사하라가 '락 웨이브'콘테스트
에서 대상을 타서 옴니버스 앨범에 <말할 수 없어>를 녹음할 때 김세황씨가
하셨죠?
김: 예.(웃음)
R: 그 때가 아마 첫 레코딩이었죠?
김: 아뇨. 그게 두 번째였구요. 그 전에 제가 아는 선배 형이 있었는데 그
형 이름이 김경섭이라고.... 그게 녹음의 아닷줄이었죠. 아, 아니구나.....아,
맞다! 사하라가 처음이었어요. 사하라가 처음이고 그게 두 번째였어요.
R: 그 녹음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김: 아, 별 뜻은 없구요... 재홍이 형님이 저를 귀엽게 봐주셨나봐요. 그 때
재홍이 형님이 무슨 일이 생기셔서 손이 안 좋으셨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해보지 않을래?' 그랬는데 저야 캡이죠. 녹음을 해본다는데 당연히 가야죠.
사실 지금 와서는 그것 때문에 참 말도 맣았어요. 아무래도 첫 녹음이잖아요.
떨리기도 엄청 많이 떨렸구요. 녹음이라는 거에 대한 시스템도 전혀 이해를
못했고... 그리고 그 당시 다운타운 멤버들, 그러니까 한종이 형이나 창현이
형 같은 경우가.... '우리 셋이서는 거의 피를 나눈 형제같은 분위긴데 어떻게
너 혼자 가서 기타를 치니 마니'부터 시작해 갖고... 참 재밌었어요.(웃음)
R: 당시에 그걸 들으면서 정말 잘 친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요즘 김세황씨의
연주를 듣다가 그걸 다시 들어보면 뭐랄까... 굉장히 어설프죠.
김: (웃음) 네, 슬프죠.
R: 그 때 처음으로 녹음하면서 배운 게 많았겠네요.
김: 어유, 그럼요. 진짜 너무 막 슬펐던 게 ... 그냥 펜타토닉 스케일이었거
든요. 분명히 저는 기타를 튜닝을 했는데 이게 튜닝이 안맞게 계속 들리는
거예요. 그리고 튜닝이 안 맞는지도 부스 안에 있으면 모르는 거예요. 꼭 나
와서 들어야지만 알고... 뭐 그거죠 뭐. 운전하는데 완전 초보운전이죠. 막 좌
회전 해야 되는데 우회전 깜박이 켜고 있고... 그런 분위기였죠.
R: 당시 장비는 인재홍씨 것을 쓰셨나요?
김: 예, 재홍이 형님 기재 썼구요. 그 때 정확히 기억하는게 ... 제 흰색 스타
인버거(Steinberger)기타, 해플러의 트리블 자이언트 프리앰프, 또 해플러 파
워 앰프 50와트 짜리랑 쿼드 라버브(Alesis Quadraverb)였을 걸요..
R: 93년에 발표한 앨범은 어디서 녹음하셨어요?
김: 지금은 나우 스튜디오라 그러는데요..지금은 없어졌죠.. 전에 가락 스튜디
오라고 거기서 녹음을 했죠.
R: 당시 앨범 녹음 때 '다운타운은 여러가지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다'는 얘
기가 많았는데, 특히 기타 녹음이라든지 이창현 씨의 드럼 녹음에 대해서....
김: 아, 창현히 형 같은 경우는 제가 생각할 때는 저랑 음악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물론 그런 것도 많지만... 일단 제가 굉장히 높이 사 주고 싶은게 대부분
의 드러머들이, 가령 예를 들어서 타미 앨드리지 같은 경우는 메트로놈에 맞춰
서 연주를 못할 뿐더러 자기는 컴퓨터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다.. 그런 주의
잖아요. 근데 제가 볼 때는 대다수의 드러머들이 그런 거 같아요. 우리나라나 일
본이나 이런 데는 댄스 음악이 하도 판을 치니까 드러머들이 리듬머쉰 같은 걸
못 다루면 못 먹고 사는 그런 시대가 와버렸지만요. 그런데 창현이 형 같은 경우
에는 그전에 일찍부터 롤랜드 R-8(드럼머쉰)가지고 장난도 많이 쳤고, 사람이 쳐
가지고 이런 느낌이 나고 기계로 해가지고 이런 느낌이 나고... 그걸 그 당시에는
정말 잘 융합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형이 귀가 너무 뛰어나요. 이 귀 감각이...
어렸을 때부터 곱게 자라가지고 (웃음) 좋은 전축 갖고 듣고 그래서 그런지 몰
라두 진짜 귀에 대한 감각이 정말 특출났구요. 그리고 대부분의 드러머들이 드럼
튜닝 갖고 고민을 많이 하잖아요. 근데 물론 더 나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 판이
... 근데 일단 소스 들어가고 그런데 있어서 드럼으로서의 역할이나, 물론 믹싱도
잘 됐지만 ... 근데 참 훌륭하게 했던 거 같아요. 창현이 형 같은 경우엔.. 그래
서 확실히 감각이 특출난 드러머다 라는 거. 그리고 저같은 경우도 엄청나게 많이
배우고 자극을 받았다는 거. 그러니까 창현이 형 아니었으면 뭐 생각 못했던 게
엄청나게 많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R: 그 분 지금은 리아 세션 하시죠?
김: 네. 리아 공연 밴드에서 드럼 치시죠.
R: 당시에 기타 녹음은 어떤 걸로 어떻게 하신 건가요? 그 땐 주로 흰색 스타인
버거 쓰셨죠?
김: 근데 흰색 스타인 버거는요, 이제와서 얘기지만 안 썼어요. 그 때 썼던 게
뭐냐면 ... 삼익에서 나오는 앨더 바디의 기타가 하나 있었거든요. 그거 이젠 집
에 잘 간직해 놨는데요, 다운타운 1집 녹음할 때는... 그 기타랑 삼익 기타랑 나
랑 놓고 ... 어떤 게 소리가 더 좋을 까 고민했었느데, 꼭 스타인버거가 비싼 기
타라고 해가지고 좋은 소리가 나는 게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아, 스타인버거는
아니다. 이건 못 쓰겠다.' 그래서 스타인버거는 그 때 뭐 썼냐 하면요 .. 그냥
클린 톤 및 약간의 크런치 톤 여기저기... 그러니까 약간 화장 역할이고요, 뼈대
는 다 그 삼익 기타 갖고 했어요. 그래서 삼익 기타에 ADA프리앰프와 마샬 50와트
진공관파워앰프와 마샬 스피커였죠.
R: 삼익 기타 픽업은 원래 달려있던 건가요?
김:픽업이 그 때 EMG81이었어요.
R: 플로이드 로즈 브릿지도 달려 있었겠네요.
김: 네, 달려있구요. 그건 아이바니즈(Ibanez)플로이드 로즈 였어요.(웃음)
R: 그 앨범 녹음은 마음에 드시나요? 지금 생각해 보면.....
김: 지금 생각하면요.. 괴롭죠.(웃음)
R: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셨나봐요.
김: 만약에 지금 그대로 그 곡들을 다시 하라 그러면요, 정말 잘 할 자신 있어요.
(웃음)
R: 그 앨범에 <The Wave>라는 연주곡이 있었죠. 요즘엔 그 곡 연주 안하시나요?
김: 아, 웨이브요.. 웨이브.. 했었어요. 했었는데요... 뭐, 하면 재밌고 좋은데
요. 근데 그 때는 이제 뭐 막 재밌게... 그게 사실은 조 새트리아니한테서 영감을
얻어가지고 만든 곡이거든요. 지금 와서 들어보면 참, 전 너무 괴로운 거 같애요.
(웃음) 왜 저거밖에 못했을까.... 그런 생각도 많이 들구요.
R: 넥스트에서도 그 곡 한 번 해 보시지 그래요?
김:넥스트에서요? 넥스트에선 그냥 뭐.... 지금 하고싶은 건 다 하고 있는 거 같
아요. 제가 뭐... 가령 예를 들어서 요즘같은 경우는 업타운한테 엄청난 감명을 받
고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도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노래가 저같은 경우엔 업타
운한테서 영향을 많이 받아가지고 우긴 거예요. 이런 걸 해야된다....(웃음)
R: 오늘 녹음하시던 건 어떤 곡인가요?
김: 라이브 앨범 두 장짜리 앨범이 이번에 나오는데요. 그 안에 들어가는 신곡이
예요.
R: 아, 넥스트의 곡이군요.
김: 네, 그렇죠. 그래서 가령 예를 들어서 업타운이랄까... 아니면 전에는 핑크
플로이드한테서 영향을 얻어서 <QUESTIONS>를 했다든가, 아니면 밴 헤일런한테 영
향을 받아서 <HOPE>를 했다든가... 뭐 화이트 스네이크 때 스티브 바이를 연상하면
서 <우리가 만든 세상>을 했다든가... 뭐, 그런 게 있죠. 그런 식으로 제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있는 거 같아요.
R: 다운타운 앨범 내고 공연 활동하고. 그러다가 당시에 맨투맨 세션을 했었죠?
김: (웃음) 아, 그거 재밌었어요. 병삼이 형님이랑 영철이 형님이랑 갑자기 판을
내신대요. 근데 일단 음악을 떠나서 되게 좋아하는 형이니까요..."아 그래요?" 그
래서 .. 한 곡을 맨 첨에 창현이 형한테 리듬 프로그래밍을 하라고 그러시더라구요.
근데 어떻게 하다보니까 창현이 형이 이건 우리 멤버들이 해야 한다고 우겼나봐요.
그래가지고 한종이 형이랑 저랑 악기 싸들고 갔죠. 그래서 그 때 삼익 기타랑 ADA
프리앰프랑 마샬 파워앰프랑 스피커랑 들고 가서 했죠. 재미있었어요.
R: 그렇게 앨범을 내고 활동을 하다가 얼마 지나서 밴드가 없어졌는데, 듣기로는
보컬 문제도 있었다고 하고... 보컬이 많이 바뀌었었죠?
김: 어.. 우리 나라 언더그라운드 락 밴드에 몸담아 본 입장에서 제가 볼 때는요
, 보컬의 불모지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선진국들의 정말 다들 먹고 자고 의리
에 똘똘 뭉쳐가지고... 진짜 뭐 걔네 식으로 따지면 걔네 라면이 뭐 아마 햄버거 1
불 짜리겠죠. 그런 거만 맨날 먹고 7, 8년을 생활하고.. 뭐 건스 앤 로지즈나 뭐
이런 애들 보면 다들 막 너무 오랫동안 연륜있게 해가지고 호흡도 잘 맞고 그런 게
너무 많잖아요. 그 때 멤버 전원들이 느낀 게 뭐였냐면요... 우리 나라 가요 시장
이라는 게 보컬의 불모지로 만들어지고 있고... 그리고 그 상황이 그 때 참 되게
안타까웠어요. 그 때 노래부르는 해연이 형 같은 경우는 다운타운하기 바로 직전
에 BMG에서 솔로 앨범을 냈었던 상태거든요. 그래서 그 형은 솔로 활동을 병행
하면서 다운타운 멤버로 있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나봐요. 그리고 멤버들도 그걸 기
분좋게 생각했고 '어 그렇게 하자'... 그래서 그러면 당연히 다운타운 때 '해연이
형 노래도 공연 때 하면 되는 거 아니냐..'그래서 했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뭐랄
까... 그룹으로서의 이미지하고 솔로 가수로서의 이미지하고 또 많이 틀리잖아요.
그래서 그런 게 서로 엇갈린 거 같애요.그건 근데 뭐 나무라는 것도 아니고... 그
형을 생각해서도 저를 생각해서도 그게 그 당시에 옳은 판단이었던 것 같고, 그리
고 그냥 시행착오였다고 생각을 하는거죠. 그 당시에 그리고 저는 너무 고마웠던
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멤버들도 다 고마왔던 게 뭐냐하면, 베이스 치던 한종이
형이나 드럼 치던 창현이 형니나 꿋꿋이 뒤에서 같이 몸담았었고.... 그리고 H2O형
들이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그래서 H2O형들도 막 이런거 저런 거 빈 구석 생기면
땜빵해 주기 바빴고...
R: 언젠가 다운타운 말기의 공연에서는 김준원씨가 보컬을 해 주신적이 있죠? 곡
도 H2O곡들 많이 하고....
김: 예. 그 때 참 재밌었어요. 일단 저 같은 경우는 H2O 1집,2집 한창 막 유행하
고 3집도 물론이었고. 그러니까 유행할 당시에 학창시절을 보낸 세대잖아요. 그러
니까 얼마나 재밌겠어요. 진짜 즐겁게 공연했죠.
R:그럼 다운타운이 없어지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보컬이었나요?
김: 네, 해연이 형의 탈퇴가 일단 첫 번째구요. 그리고... 쉽게 말씀드리면 지친
거예요. 멤버들이 지쳤어요. '더이상은 이대로 못 가겠다' 라는 결론이 그 때 난
거예요.
R:앨범을 내고도 일이 잘 안 풀린 거군요.
김: 그쵸. 그러니까 일이 만약에 풀릴래면 풀릴수도 있었어요. 그 상황에서. 근데
사람 일이라는게 그렇더라구요. 항상 100프로를 눈 앞에 두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
은데요. 그 때 해산을 했던 것도 그것 중에 하나였던 거 같아요. 사실 지금 와서 이
렇게 평가해 주시고 이런 게 다 뭐 기분 좋은 일이고 다 그렇지만, 다들 하시는 말
씀이 '쪼금만 더하지'라는 말씀이예요. '아 그랬었구나'... 근데 뭐, 좋은 추억이
었던 것같아요.
R: 그러고 나서 넥스트 들어간 게 언제뇨?
김: 94년 8월이요.
R: 넥스트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하신 게 그 두장짜리 라이브 앨범.
김: 그렇죠. 그러니까 맨 첨에 한 건 정확히 뭐였냐 하면요. 그 '날아라 병아리'
앨범을 녹음하고 있었어요. 94년 5월에요. 근데 그 때 정기송씨가 넥스트를 탈퇴하
고 ... 기타리스트가 없으니까 신해철씨가 세션맨을 여기저기서 고용을 한 거예요.
그 때 그 판 잘 뒤져보시면 뭐...드럼치시는 분은 송골매 옛날에 드럼 치던 형이
드럼을 치셨구요.
R: 이건태씨요?
김: 예. 건태 형님이 드럼을 치셨고... 막 여기저기 세션맨들 짬뽕이예요. 진짜
그 앨범은 그룹 앨범이 아니고 완전히 무슨 가수 앨범이예요. 진짜... 연주인들 목
록 보면요(웃음). 근데 그 중에 이중인격자란 노래가 있는데 5월달에 그 곡을 완성
을 해놨었어요. 근데 이제 기타리스트를 구한다 그랬는데 저는 그 때 당연히 '난
다운타운이니까 못한다'예요. 그래서 제가 '그러면 대신 누구를 소개시켜 드릴께
요'... 그래서 소개를 시켜드린 게 임창수씨예요. 창수 형님 같은 경우는 제가 굉
장히 존경하는 형이었고 제가 워낙 많이 배웠던 형이니까 .... 그래서 '형, 제작
은 무슨 제작이예요. 기타나 쳐요.'(웃음) ...그래가지고 소개를 시켜 드렸는데..
창수형님하고 그 때 이수용씨가 같이 가입을 한 거죠. 넥스트에... 그래서 그 분
들이 앨범을 완성했던 거죠. 그리고 저는 나중에 들어가서 라이브 앨범 그 두 장
짜리를 녹음을 했죠.
R:그럼 임창수 씨는 그 앨범 녹음만을 위해서 잠시....
김: 그렇죠. 그러니까 임창수씨 같은 경우는 활동을... 그러니까 앨범 녹음을 하
실 생각을 하시다가 그 때 '에코'라는 .. 지금 에코라는 여자 3인조 그룹있잖아요?
그 그룹의 프로듀서예요. 그래서 한참 제작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아, 해철아.
나는 안 되겠다, 나는 제작을 해야지 지금 기타칠 때가 아니다'그래서 나오신 거예
요.
R: 라이브 앨범 녹음 당시에는 해플러 트리플 자이언트 프리앰프 쓰셨죠?
김: 네. 그 앨범은 해플러랑 메사부기죠. 해플러랑 메사부기 파워앰프였고요.
R: 지금도 쓰시는 메사부기 395파워앰프요?
김: 네. 그리고 기타는 스타인버거랑....뮤직맨 EVH를 처음 녹음한 게 그 앨범이
었죠.
R: 넥스트 가입 전에도 신해철씨 음악을 좋아했었나요?
김: 아... 예. 좋아했죠. 제가 기억하기로는요, 제가 고3때 압구정동에... 그 때
여름에 넥스트 앨범이 나왔어요. 근데 카페면 카페마다 다 넥스트 노래가 나오고..
진짜 막 당연히 좋아했죠.
R: <도시인>을 필두로 해서....
김: 네. <도시인>을 제일 좋아했구요. <도시인>, <영원히>, 그리고 뭐지?
<TURN OFF THE TV>, 뭐 <인형의 기사>, <아버지와 나> 이런 거 다 좋아했었어요.
근데 제가 설마 그걸 하리란 생각을 못했죠. 나중에....(웃음)
R: 정기송씨도 임창수씨처럼 원래 알던 사이였나요?
김: 아, 정기송씨는 옛날에 제가 다운타운 앨범 녹음할 때요, 그 때 통기타 빌려
주셨어요. 그래서 다운타운 앨범 왜 special thanks에 기송이 형님 성함이 기재가
돼 있죠. 정기송씨는 왜 자기 이름이 거기 있는지 모르시더라구요. 그래서 '야 그
게 왜 있냐'그러시는데 '아, 그 때 형이 통기타 빌려주셨잖아요, 그래서 너무 감
사드린다고'... 그런 일이 있었죠.
R: 처음 넥스트 가입하고서 밴드 적응은 잘 되었나요?
김: 여러모로 힘든게요...제일 힘들었던 게 신해철씨하고 이동규씨가...
R: 당시엔 이동규씨가 베이스였나요?
김: 그렇죠. 이동규씨가 드럼 프로그램과 베이스를 했 죠. 근데 제가 그 때는
좀 챙피한 얘기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적응이 안 됐던 게 신해철 씨 같은 경우는
뭐 아주 오랜 세월동안 뭐 유명인으로 지냈고, 그리고 이동규씨도 뭐 유명인으로
지내는 상황이었는데 저는 그 유명세라는 거를 몰랐어요. 그 당시에는. 그래서 다
운타운 때는 맨날 그냥 연습만 하고 살다가 팀을 딱 들어갔는데... '아, 이 팀의
기타리스트가 되기 위한 조건이 음악은 당연히 잘 해야 되는 거지만 그 이외에도
너무나 많구나'... 그리고 '생각해야 되는 것도 많고 제가 앞으로 적응해 나가야
하는 부분도 참 많구나'라는 걸 그 때 참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들어간 첫 몇 달
간은 진짜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왜 군대 들어가면 맨 첨에 6주 훈련하잖아요. 그
런 기분이었어요, 진짜. 그러니까 너무 틀렸어요. 다운타운 때 상황하고 넥스트의
상황은 하늘과 땅 차이였어요. 하필 또 그랬던 게 뭐냐면 , 다운타운은 맨날 소극
장이나 아니면 간혹가다가 체조 경기장 같은데서 있는 어떤 공연 행사 같은 것만
하다가, 그 때 한창 '날아라 병아리'가 유명했거든요. 그거 홍보하느라고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는데 그거조차도 너무 생소한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그 때는 어떤 생
각까지 들었냐 하면요...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진자 내가 기타 맞나?'....
이런 생각까지 들고 그랬어요.
에고에고 헉헉... 오늘 올린 정도의 분량만 또 올리면 될 거예요..
(그걸 또 언제 치지?--- -_-; 그래도 칠께여..)
P.S. 세황님 어투가.. 재밌다... 웃음이 많으신가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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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침 내 록 밴 드 의 함 장 이 되 어 돌 아 온 신 해 철 ***
대 담 : 신 해 철 VS 강헌
일 시 : 1995년 10월 28일
세상이 변해 갈 때 같이 닮아 가는 내 모습에/때론 실망하며 때로는 변명
도 해보았지만/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우리 앞의 생이 끝나 갈 때` [무한궤도]
헌:봄에 두 장짜리 라이브 앨범을 통해 풀 밴드로서의 일신한 면모를 보인
뒤를 이어 드디어 "part 2" 앨범이 모습을 드러내었다."세계(world)"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앨범은 지난 92년부터 선보인 밴드 넥스트(N.EX.T)가
본격적인 록 밴드로서 기향하는 시발점으로 보인다.달리 말하면 신해철의
넥스트가 아니라 넥스트의 일원으로서의 신해철인 것이다.물론 당신이 이
밴드의 구심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게다가 당신은 데뷔 때부터 몸담아
왔던 메이저 음반 회사를 나와 `REVOLUTION #9` 이라는 독립 프로덕션을
세우지 않았는가? 따라서 이번의 인터뷰의 화두는 밴드,과연 한국에서 록밴드
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가 될 것이다.새로운 앨범을 낼때마다 화제가 되고
있는 앨범의 재킷 디자인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하자.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에
중점이 놓인 화려한 넥스트의 앨범 디자인은 록 정통주의자들에게는 사치로
보일 수 있다.
철:사진보다도 더욱 판타스틱한 감흥을 주는 그래픽들,동화적이고 SF 적인, 가령
프로그레시브의 대표적인 일러스트인 로저 딘이 만든 예스 Yes 의 앨범
"Fragile" 이나 아시아 Asia의 재킷을 좋아한다.영화 역시 SF판타지물을
좋아하는데 스탠리 큐브릭 류도 좋지만 사실감이 약간 결여되어 있는 <브라질>
이나 <스타워즈>의 팬이다.<슈퍼맨> 같은 철저한 아동물만 아니면.
헌:그것은 당신의 미학관에 전면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것인가?
철:그렇다.작가가 구성해 내는 새로운 세계가 나를 흥분하게 한다.미카엘 엔데를
예로든다면 "모모" 보다도 "왕자 크눌프와 13악당"이 더 좋다.어린 날 나를
사로잡은 책은 J.R 톨킨의 "반지 Lord of Ring"(그 1권이 내가 국민학교 5학년때
출판되었고 한국어 제목은 '호비트'이다)이다.옥스퍼드의 언어학자가 쓴 이 책은
중세의 전설과 역사를 재구성하여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굉장히 아름다운 판타지
인데,책 말미의 연표를 뒤적여 보아야 스토리가 간신히 잡힐 정도이다.고대 영어를
공부할 기회가 혹시라도 주어진다면 원어로 도전해보고 싶은 첫 번째 책이다.
헌:그렇다면 한국 영화,혹은 소설로부터 받은 영향은 어떤가?
철:방화가 전멸하던 나의 세대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시각은 참혹하다.따라서 영향의
흔적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고,그것은 소설도 마찬가지이다.학교에서 독후감을
쓰라면 김유정,황순원인데,거기에서 바로 건너뛰면 수업시간에 '인간 시장'을
몰래 돌려 읽는 것이다.나의 성장기를 둘러싼 이런 문화적 풍토가 데뷔 초창기에
방송국의 PD들이 '너의 음악에는 뽕끼가 없어서 성공하기 힘들겟다'고 걱정하게
한 것 같다.아주 옛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서구의 이상적인 모델을 추적할 수밖에
없었다.
헌:음악,특히 록음악에 있어 당신의 이상적인 모델은 어떤것인가?
철:예스와 C.C.R 의 음악을 두고 논쟁을 붙여 보자.프로그레시브는 그저 현학적이지
않는가? 간단한 리프만으로 로큰롤의 에너지를 표현하는데 충분하지 않은가?
맞는 말이다.그러나 나는 C.C.R 보다 예스를 듣는다.이것은 다만 취향이다.나는
프로그레시브 앨범의 주제 중심적인 컨셉트를 선호하고 실크블라우스와 망토를
선호한다.
헌:그러면 취향이 뿌리 뽑힌 자들의 장르로서의 록 음악의 기조와 모순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철:청바지와 가죽 재킷이 지존 권위에 대한 저항이어야 하는데 지금 여기는
그것 자체가 권위화 하는데 굴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들로부터 자신이
자유로와야지 남더러 자유로와라 강요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위선이다.
헌:당신이 파학하는 당신의 음악적 원체험은 어떤 모습인가?
철:나의 음악적 원체험에 대해선 나도 잘 모르겟다.혹시 디스코가 아닌지? 농담이
아니다.나중에 맞은 헤비메틀 처럼 충격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오케스트라
의 사운드(특히 홀스트의 "혹성"이나 베토벤의 교향곡,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와 보니엠의 디스코는 굳이 말하자면 70년대 후반에 십대를 시작했던 나의 음악적
원체험의 공간에 아직 잔존하고 있다.내가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하고 난뒤로
일관되게 나타났던 오케스레이션에의 욕망도 아마 그런 영향이 아닐까? 그리고
나중에 프로그레시브를 만나자마자 확 끌리게 되었던 것도 아마......
헌:당신은 스쿨밴드적부터 딥퍼플 같은 하드 록 사운드에 매료되었다고 작년의
인텨뷰에서 밝히지 않았는가?
철:아니 다만 원체험의 중심 축에 록이 없었을 뿐이다.나는 올바른 음악의 태도가
정통적인 것(orthodox)과 새로움을 찾아다니는 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나는 그중에서도 후자에 대해 좀더 매혹되어 있을 뿐이다.
헌:당신의 그런 입장과 주류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엇다는 전력(?) 때문에 당신의
록이 기회주의적 산물이라고 혹평하는 마니아 혹은 언더그라운드의 뮤지션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안다.
철:3류밴드의 음악을 들어도 꼭 하나의 장점을 챙길 줄 아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프로그래시브 골수 수용자들이나 헤비메틀 이외의 음악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을 인정하지 않는다.세계관이 없는 아방가르드에 코가 걸려 우왕좌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되는 태도이며 하나만을 붙잡고 그것만이 전부라고 믿고
있는 고집 역시 보다 풍부한 음악 경험으로 극복되어야 할 태도이다.루돌프 쉥커가
어느 인터뷰에서 댄스 그룹인 펫 숍 보이즈 Pet Shop Boys를 좋아한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만약 한국의 신대철이 그랬다면 아마도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헌:역시 작년의 인터뷰에서 당신은 한국 대중음악의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빈 곳을
메꾸는 링커가 되고 싶다고 밝힌적이 있다.풀 밴드의 틀을 갖춘 지금 그 명제는
여전히 유효한가?
철:여전히 유효하다.그러나 'REVOLUTION #9'로 독립하면서 공격형 링커에다 이 회사의
음악부분을 책임져야 하는 감독의 역할까지 부가되었다.넥스트의 멤버로서의 작업
이외에,즉 록 이외에 내가 풀어 놓아야 할 것이 있는데,바로 테크노이다.
솔로 1,2집과 "Home" 앨범은 바로 테크노에 관한 포석이나 다름 없는데,이제는
프로듀서로서 단순한 댄스뮤직의 테크닉으로 전락한 한국의 테크노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즉 Art of Noise 나 Kraftwerk 같은 그룹이 추구했던 테크노의
본질에 도전하고 싶다.이에 대한 첫번째 대답은 'REVOLUTION #9'에서 준비하고
있는 테크노 밴드 Digital Asia 라는 신인 밴드 작업이 될 것이다.
헌:다양한 장르에 대한 당신과 당신 동료들의 관심은 이번 앨범에서도 드러난다.
66분이 넘는 장대한 러닝 타임 동안 당신들은 발라드에서 스래쉬 메틀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며 여기에다 국악에 대한 어프로치도 추가되어 있다.
철:여러 장르를 쥐고 가는 것에 대한 록 정통주의자들의 비판적인 입자을 잘 알고 있
다.우리는 록 밴드를 하면서 기타 앰프나 마이크 세팅부터 공부해야 하고 수없이
생겨나는 문제들을 미친년 널뛰기 하듯이 이리 막고 저리 막는다.이와 동시에 나는
플레이어이면서 싱어이고 프로듀서이다.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음 번 음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성공 이외의 것을 포기하고 있다는 말이다.나를 얕잡아 보는
이들에게 먼저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은 만약 잘 팔리는 것만 하려면 지금보다 훠리
훨씬 더 쉽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나의 목표는 한 장르의 오소독스한 것으로
성공할 수 있는 저변을 만드는 것이다.그러면서 나도 그틈에서 성공하는 것이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나에게 쓰는 편지" `Myself`
헌:또 다른 한편으로 이번 앨범은 엄청난 분량의 스튜디오 작업을 투입한,음악과
음향의 순례자인 당신다운 모험이다.당신에게 "part 2"앨범의 의의는 무엇인가?
철:"part 2"앨범은 스리랑카 영화계에서 스필버그 식의 초대형 스펙터클 영화를
기획하는 것과 같이 결코 완성될 수 없는,무모한,일단 공격하고 본다는 다소
조급한,그래서 일단 문을 여는 데는 성공했지만(어쨌거나 앨범은 완성되었으니까)
집중적인 완성도 자체는 어쩔수 없이 떨어지는 앨범이다.풀 밴드로 멤버 구성을
마친 뒤 정규앨범으론 첫번째 앨범이 `part 2`라는 불연속성에서 출발해야 하는
모순,따라서 이번의 "part 2"는 "part 1"의 후속편이 아니라 넥스트라는 이름
하의 다음 네번째 앨범을 위한 것이다.이 다음 앨범을 위해 그 동안 누적된 모든
문제를 전부 털어내어 해결해 버리겠다는 각오로 접근했다.노래 하나하나의 완성도나
앨범의 컨셉트보다도 더욱 중요했던 과제는 '사운드란 무엇인가?' `밴드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였다.그리하여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았으며 조금이라도 여지만 보인다
싶으면 그 지점에서 멈추어 섰다.요컨데 이 앨범 작업동안 내내 되뇌인 넥스트의
첫 번째 임무는 도대체 대한민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밴드가 살아 남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헌:그러나 다양한 장르간의 혼란스러운 부딪힘은 록 밴드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위협
하는 것이 아닌가?
철:"part 2"앨범의 장르가 다양한 것은 멤버들의 다양한 음악적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그리고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고의적인 세팅이기도
하다.이 앨범의 구성을 도형으로 풀자면 무질서의 질서이며 색체적으로 보자면
콘트라스트의 강조이다.다시 말해 극악무도한 것과 정서적인 것들의 혼융이다.왜?
'세계 world'--바로 앨범의 타이틀--는 괄호 열면 바로 혼돈이니깐.이와 같은
지극히 혼란스런 광기를 표현하고 싶었고 중구난방격인 멤버와 나의 음악적 방향
때문에 오히려 음악적 재료들은 넘쳐 흘렀다.
헌:그렇다면 정통적인 혹은 당대적인 록의 음악적 방법론을 고의적으로 탈피했다는 뜻
인가? 그리고 얼터너티브 록의 문법을 탑재하고 넥스트의 앨범에 뒤이어 나온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4집)과 비교한다면?
철:록 넘버 뿐만아니라 어떠한 곡에서도 그 장르의 정통적인 입장에서 접근하지 않는
것이 이번 앨범의 또 하나의 컨셉트였다.굳이 딱지를 붙이자면 장르와 장르 사이의
퓨전 fusion 이라고 할까? 서태지는 흑(힙합)과 백(얼터너티브)이라는 양쪽의
하위 문화의 정통을 동시에 쥐고 가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
헌:당신이 꼽는 베스트 트랙은 어떤 곡인가?
철:"PART 1"에서는 단연 'The Ocean'.만약 두 앨범이 한번에 묶여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곡은 여전히 앨범의 엔딩이 되었을 것이다."PART 2"에서는 지금은 "세계의 문"
트랙을 누르는데,앞으로는 "The age of no god"이 될 것 같다."Requiem for
Embryo" 도 좋지만 나 혼자 한 것이라서 애착이 덜 간다.
헌:개인적으로는 낙태의 문명적 비극을 국악의 구음과 당신 특유의 사운드 실험의
결합을 통해 형상화한 "Requiem for Embryo"가 앞으로의 넥스트의 음악적 방향을
가늠짓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생각한다.유하 감독의 영화 <바람부는 날이
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의 사운드 트랙 앨범에 등장했던 "Komerican Blues"를
국악의 방법론을 투입하여 다시 재등장시킨 것은 어떤 이유인가?
철:"Komerican Blues"는 변칙 테크노 밴드때와 풀 밴드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주는 곡
이다.그 곡과 같은 스타일로 몇 곡을 만들엇는데 ,멤버 전원이 구관이 명관이다고
이구동성으로 판정했기 때문에 다시 녹음하게 된것이다.화이트스네이크Whitesnake
의 "Crying in the rain"의 경우처럼 넥스트의 팬들에게 밴드의 성장을 보여주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헌:음악적인 측면에 있어서 이번 앨범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은 사물과 창을 도입함으
로써 서구 문법 중심적인 당신의 음악적 질서에 국악을 혼융한 것이다.국악과의
퓨전이 당신과 넥스트의 앞으로의 작업에 어떤 의미로 기능할 것인가?
철:오래전부터 생각한 화두 였다.그러나 <서편제>가 뜨고 서태지의 "하여가"가 나오는
바람에 보류했다.국악적 어프로치 마저 개때 근성이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태지가 계속 할 줄 알았는데 단발로 끝났다,계속 연구는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국악과의 결합은 섣부르게 한번 해볼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일단 "part 2" 에서는
앞으로 국악과 대중음악이 퓨전을 할 때 어떻게 접합할 것인가의 얼개도를 보여주고
싶었다.나의 길은 서양악기를 중심으로 이방인의 관점에서 접근해 가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사물을 기타,베이스,드럼의 퍼커션으로 접근했으며 창을 스캣 솔로
보이스로 놓고 블루스 음계와 중립무황태라는 5음계 사이의 상호 흡입성을 실험했다.
"Requiem for Embryo"의 발상은 중학교때 핑크 플로이드의 라이브 "Great gig in
the sky"를 들으며 그 속의 흑인 스캣을 창으로 바꾸어도 어울리겟는데 하고 생각
한 적이 있다.그 때의 소박한 발상을 이제야 한번 시도해 본 것이다.앞으로 국악과
의 결합은 본격적으로 벌일 예정이며 넥스트의 네 번째 정규 앨범의 주력내용이
될 것이다.(옮긴이 주:그러나 4집은 애니메이션 트랙을 겸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진
않았다."아리랑"과 "난장부기"에서 잠깐 보여준 것으로 끝났다.)구체적인 내용?
미리 공개하면 재미없지 않겠는가?
헌:나는 지금의 라인업으로 첫선을 보인 지난 라이브 앨범을 들으며 다운타운 출신의
기타리스트 김세황의 합류가 풀 밴드로서의 넥스트의 비상에 날개를 달아주리라는
기대를 가졌고 그것은 앞으로도 당분간 유효할 것이라고 판단한다.록밴드의 핵심
중의 하나가 기타가 아니겠는가? 그는 정확무비한 테크닉과 음악에 뛰어드는 뛰어
난 감각을 지녔고 당신이 소망하는 음의 질서에 화룡점정하는 카리스마도 있다고고
생각한다.한번이라도 넥스트의 라이브를 본 이라면 김세황의 기타플레이를 잊지 않
을 것이다.그러나 이번의 "part 2" 앨범에서 그는 넘 기교 위주의 플레이에 멈춘것
은 아닌지,그리고 지난 라이브 앨범에도 수록되었던 기타 연주곡 'Love Story'가
재수록된것은 좀 실망스러웠다.
철:절제와 균형을 얘기하는 것의 근거가 대가들의 코드 연습을 게을리하는 것의
변명이 되어서는 안된다.김세황이 저 '러브스토리'에서 끝나는 수준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적어도 한국에서 신대철이라면 모를까.
이런 과정을 거쳐야 대가의 절제와 균형을 얘기할수 있는,혹은 기대할수 있다고
생각한다.이제 앨범 두 장을 녹음한 친구한테 대한 비난 혹은 기대가 너무
애매모호하다.그에 대한 평가는 그리 멀지 않을 시간에 나올 그의 솔로 앨범으로
미루기로 하자.
헌:그러나 김세황은 이번 앨범에서 당신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기타와 당신의 키보드가 대립한 적은 없는가?
철:이번 앨범에서 가령 'Money' 같이 키보드 사운드가 많은 트랙은 내가 주도했고 기
타가 중심적인 트랙은 김세황이 주도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 반대이다.
김세황은 디스토션이나 속주 같은 헤비 메틀의 테크닉을 싫어한다.그래서 '우리
가 만든 세상을 보라'를 만들땐 다시는 이런일이 없을 것이라는 선서를 하고 강행
했다.
헌:베이시스트 김영석이 만든 발라드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가 이번 앨범의
판매에 기여한 바가 크다.그러나 이곡이 평범한 러브 발라드로 전락하지 않은 것은
동성동본의 문제를 끌어들인 당신의 메시지에 힘입은 바 크다.하지만 앨범의 해설
지가 없었다면 노래 자체로는 그러한 메시지를 알아차리기 힘들다.텍스트 자체가
아닌 컨텍스트의 동원에 의한 해결은 견강부회의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철:억지로 갖다 붙인 거 아니냐는 의심,충분히 인정한다.그러나 이 노래를 캠페인 송
이 아니다.메시지의 직접적인 표출이 가장 마음에 들게 형상화된 것으로는 가령
제1회 '내일은 늦으리'에서 발표했던 '1999'와 같은 노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동성동본에 관한 문제를 '그대와 나는 성이 같아서......'같은 류로
쓰고 싶지 않다.다만 한발짝 물러서서 단 한가지의 내용만 제시하고 싶었다.
'힘들어하는 당신들에게도 편이 있다는 것!'
........낡은 전축에서 흐르던 가슴 벅찬 노래 알 수 없는 설레임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았지/처음 기타를 사던 날은 하루종일 쇼 윈도우 앞에서 구경하던
빨간 기타 손에 들고 잠 못잤지/비웃던 친구들도 걱정하던 친구들도 이젠 곁에
없지만 노래여 영원히......
'영원히' [Home]
헌:당신은 밴드로 시작해서 (무한궤도) 솔로로 전향했다가 다시 밴드로 회귀했다.
그리고 당신의 공식적인 입문은 대학가요제 그랑프리라는 화려한 등용문을 통해서
였다.풀밴드의 라인업을 완성한 지금 시점에서 무한궤도를 돌아본다면?
철:무한궤도는 모든것이 미완이었다.음악도 미완의 프로그레시브,미완의 록,미완의
발라드,미완의 재즈(이는 주로 정석원의 관심이었고),심지어는 일본 팝까지 이리저
리 떠밀려 다녔다.이顁蓁를 단 세글자로 줄인다면 새로운 것도 아니고 부시는 것도
아닌,'뭔가 좀......'이라고 할 수 있다.한장의 앨범을 끝으로 솔로롤 나섰을 때
무척 홀가분했고 자신도 있었다.
헌: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무한궤도는 한 장의 앨범으로 끝이나고 동료였던
조형곤과 정석원은 015B 를 통해 당신과의 또다른 축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이 분극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면?
철:격심했던 마음 고생 때문에 다시느 밴드를 안하리라 마음 먹었을 정도이다.
미워하거나 사이가 나빠진것은 아니다.괴리의 핵심은 음악에 대한 태도인 것 같다.
그들도 음악을 좋아하고 많은 것을 희생하지만 자신의 미래까지 희생할 정도는 아
니라고 느껴졌다.그리고 리더로서의 역량이 미숙했던 것도 하나의 요인이다.
헌:그리고 당신은 90년대의 벽두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솔로로 데뷔했으며 발라드 '슬
픈 표정 하지 말아요'를 앞세워 아이돌 스타의 일인이 된다.그리고 뒤이은 "Myself
"앨범으로 80년대와 결별하는 새로운 감수성의 지지자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한다.
철:이젠 프로인 것이다.단지 그것만으로 기뻤다.1집은 찻길도 신기하고 육교도 신기하
네,버스를 타보면 어떨까 하는,정교한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닌 그저 기뻐서 날뛰는
것이었다.밴드가 사라진 후 내손에 쥐어진 무기는 여러가지의 실험을 가능케 했던
시퀀서였다.그러나 바로 두번째 앨범 "Myself"를 마치고 나자 시퀀서로는 더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기계'의 한계를 느끼고 다시 '사람'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과도적인 형태로 나오게 된것이 바로 넥스트라는 3인조 밴드의 형태로
나온 "Home" 이다.
헌:바로 이 대목이 당신에게는 장르에 대한 끝없는 탐험의 시기가 될 것이다.한낱 욕
심으로 그쳐지기 쉬운,다소 무리한 시도를 당신은 수행했고 또 시장에서의 또 시장에서의 승리라는 진리품까지 얻었다.
하나의 장르에 임하는 혹은 장르와 장르간의 관계 설정에 임하는 당신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철:"Myself"앨범은 시퀀서 프로그래밍을 바탕으로 R&B 멜로디 보컬에 인트로는 랩인,
거의 음악의 프랑켄쉬타인을 만들어내는 닥치는 대로의 조합이었다.더이상의 새로
운 장르는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아마도 랩이 마지막 장르가 아닌가 한다)
이제부터의 승부는 누가 어떤 것을 섞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방송가수'를 하면서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앗던 트로트와 방송의 권위가 무
너 지는 것을 보앗고 그전엔 5공 청산을 통해 전두환이 무너지는 것을 봤다.새로운
한줄기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최소한 나하나는 깨져도 다음은 될 것이라는 확신
이 나를 감돌았다.
헌:그러나 또 한편으론 이 시기는 랩과 레게,R&B 등 흑인 음악 언어가 이 땅에서 패권
을 차지하게 되는 시점이기도 하며 80년대 중후반 융기의 조짐을 보엿던 록음악이
다시 패퇴하는 시점이기도 하다.당신이 보는 90년대 전반의 한국 어떤것인가?
철:흑인 음악이 부상하게 된것은 이 땅에서 백인 음악이 깨졌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땅의 흑인 음악은 전달자가 백인인,온전하지 않은 흑인 음악이다.흑인음악은 흑인의
음악이면서 흑인이 즐기는 음악이다.서태지의 신드롬 이후 불붙은 흑인 음악의 개떼
현상은 다른 장르를 전부 죽엿고 결국 자신마저 죽이고 있다.그리고 샘플러의 오용
은 음악을 조립공작 키트로 만들어가고 있다.이 가운데 모든 음악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록음악이 자신의 길을 세우지 못하고 처참하게 무너져 버린것이
최악의 비극이다.분노한 록 팬들은 컬트화 하고 다른 장르에 대해서 적개심만 증폭
되었다.
헌:이시기는 특히 PC 통신 같은 퍼스널 네트워크를 통해 대중음악의
적극적인 수용자들이 대중음악 담론을 형성해 가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그것은 또 한편으론 문화산업 시대의 초기 마니아들의 구축과정
이다.서태지와 더불어 당신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 담론의 주역
이었는데 당신이 판단하기에 지금 여기의 마니아 문화는 어떠한가?
철:.........편견은 또다른 편견을 위해 봉사한다.
내가 기타 키드엿던 시절 블루스나 재즈를 하면 배신자라고 비난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라이트 핸드 주법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얼터너
티브 일색이다.언더건 오버건 편견으로 미만하여 등수를 매기고 배타적으로
애호하는 한 불행한것은 자신 뿐이다.천민적인 수용형태를 교정하려면 마니아
들의 도움이 필요한데 오히려 백지상태의 수용자들이 훨씬 희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이들은 남을 중오하지는 않는다. 도대체 음악 그자체가 왜 증오의 대상이 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