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스크로 가는 기차

 

 


 

"아주 오래전이지만, <곰스크로 가는 기차> 라는 단편소설을 읽은적이 있어.

독일 작가가 쓴 것이었는데, 그나라 말을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삼아 번역한 거였어.

무슨 동인지 같은데 실렸거든."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우린 무척 오랜만에 만났다.

하지만 별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인연을 맺은지 십여년 정도가 지나면,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 같은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지는 법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 변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두아이의 아버지니까.

 

"... 그런데?"

 

나는 갑자기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껏 흘러오던 대화의 맥을 뚝, 끊어버리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은 것이다.

그가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로 말하자면, 언젠가 한번 그에게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건 대학시절을 같이 보내고, 졸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남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였다.

그 수많은 남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그'가 이야기를 듣게 된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그자리에 그가 있었고, 나는 이야기를 시작해버린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기차를 타고 있어. 그 기차는 곰스크로 가는 기차야.

두 사람은 이제 막 결혼을 했고,

지금까지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고해.

남자는 어릴때부터 곰스크를 동경해왔어. 늘 아버지에게 곰스크에대한 이야기를 들어왔지.

하지만 곰스크는 멀고, 그곳으로 가는 기차표도 비싸.

남자는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처분해서 곰스크로 가는 두장의  표를 샀어.

그리고 두사람은 가방 하나만 들고 기차에 올라탔어.

곰스크로 가려면 며칠동안 기차를 타야 했지."

 

"... 그래서?"

 

'왜 그이야기를 하는거지?'라고 그의 눈이 묻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남자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여자는 불안했어.

곰스크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두사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야.

불안한 여자는 기차에서 주는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잠도 자지 못했어.

남자는 걱정이 되었지만 곰스크에 도착하면 모든것이 잘 풀리리라 생각했지.

이틀쯤 기차를 타고 갔을 때, 어느 작은 역에서 기차가 섰어.

두시간정도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한다는 거야.

두사람은 기차에서 내려 작은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했어.

오랜만에 땅을 밟고 맑은 공기를 마시니까 기분이 좋아졌지. 게다가 그마을은 무척 아늑했어.

여자는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언덕으로 산책을 하러 가자고 했지.

남자는 기차가 혹시 떠나버리는게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었지만,

모처럼 활기를 되찾은 여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어.

두사람은 작은 언덕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았고 여자는 잠이 들어버렸어."

 

"기차는?"

그는 이제 내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것 같았다.

 

"그들이 있는 언덕에서 기차가 서있는 작은 역이 보였지.

남자는 너무나 곤하게 자는 여자를 깨울 수가 없어서 초조해하며 기차를 지켜보고 있었어.

마침내 기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떠날 준비를 했지. 남자는 어쩔수 없이 여자를 깨웠어.

그들은 가방을 들고 기차를 향해 뛰어갔지.

하지만 그들이 역에 도착했을때 기차는 막 떠나버린거야.

남자는 여자를 원망했지만 여자는 대수롭지않게 다음기차를 타면 되지 않냐고 말했지.

그 작은 역에는 역무원이 한사람밖에 없었어.

그에게 물어보니, 다음 기차는 다음날이 되어야 온다는거야.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하루에 한대밖에 없었던거지."

 

"그래서?"

카페의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던 그가 몸을 일으켜 내쪽으로 좀더 가까이 다가왔다.

 

"할수없이 그들은 하룻밤 묵을수 있는 곳을 찾기로 했어.

그마을은 너무 작아서 호텔도 없었지.

그들은 식사를 했던 식당으로 가서 하룻밤 잘수 있냐고 물었지.

식당의 주인은 여자였는데, 그들을 이층에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했어.

하지만 그들은 숙박비를 지불할 돈이 없었어. 기차표를 사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되었으니까.

주인은 남자에게 식당의 낡은 테이블과 의자를 손봐줄 사람이 마침 필요했다고 하면서,

그렇게 해주면 잠을 재워주겠다고 했지.

남자는 그곳에서 일을 했고, 두사람은 저녁을 얻어먹은 후 잠을 잤어.

다음날, 남자는 기차가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여자를 데리고 다시 역으로 갔어.

하지만 기차는 그 역에 서지않고 그냥 지나가버렸어.

역무원은 그 역에서 그 기차가 항상 서는건 아니라고 말해주었지."

 

"그럼 그들은 다시 식당으로 돌아갔어?"

 

"응. 두사람은 그곳에서 또 일을 거들어주고 밥을 먹고 잠을 잤어.

그리고 다음날 또 기차를 타러갔어. 그날은 기차가 그 역에 섰고,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내렸지.

그 작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위해.

남자와 여자는 기차에 올라타려했지만, 기차의 승무원이 그들을 가로막았어.

그들이 가지고있는 기차표는 이틀전 것이잖아.

그표는 이미 유효하지 않았으니까 새로 표를 끊으라고 했어. 하지만 그들은 돈이 없었지."

 

"저런..."

 

"할수없이 두사람은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어.

그곳에는 기차에서 내린, 곰스크로 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지.

주인은 돌아온 그들을 보더니 어서 일을 도와달라고 하는거야.

두사람은 식당에서 일을 했고, 손님들에게 팁을 받았어. 남자는 식당 주인에게 제안을 했지.

그곳에서 계속 일을 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 대가로 먹고자게 해달라고.

그리고 자신은 손님들에게 받은 팁을 모아 기차표를 사려고 했던거야.

물론 기차표를 사려면 꽤 많은 돈을 모아야 하니까 그들은 그곳에서 꽤 오래 머물러야 했지."

 

"그래서?"

 

"두사람은 그곳에서 일을 했어. 남자는 조금씩 돈을 모았지.

기차가 그마을에 서면 손님들이 와서 식사를 하고 팁을 주지만,

기차가 서지 않은 날은 돈을 모을수가 없었어.

하루는 여자가 가방에 있는 옷들을 꺼내어 작은 옷장에 집어넣었어.

남자는 언제라도 떠날수 있도록 가방을 싸두고 싶었지만 여자가 고집을 부렸지.

또 다음날 여자는 식당 주인에게 못쓰게 된 소파를 얻어와서 새천을 입혀 방안에 놓아두었지.

그 다음날에는 마을사람들에게 의자와 테이블을 얻어왔어.

그렇게 하나둘씩 살림살이가 늘어났지.

여자와 싸우기도 지겨워진 남자는 묵묵히 일을 하고, 작은 병에다 손님들이 준 팁을 모았어.

꽤 오랜 시간이 지난후에야 드디어 두장의 기차표를 살 수 있는 돈이 모아졌어.

남자는 작은 역으로 가서 곰스크로 가는 기차표 두장을 샀어. 그리고 다음날 기차가 왔지.

여자는 마지못해 남자의 손에 이끌려 역으로 갔지만, 기차를 타지 않으려고 했어.

달래고 화를 내도 소용이 없었지. 여자는 그렇게 가고 싶다면 혼자 가라고 소리쳤어.

남자도 화가나서 막 떠나려는 기차에 혼자 올라탔지.

그때 여자가 외쳤어. 당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

그가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었고 우리는 가볍게 건배를 하고 맥주를 마셨다.

"남자는 기차에서 내렸겠지?"

 

"응. 남자쪽에서 본다면, 상황은 더욱 나빠졌지.

그동안 애써모은 돈은 기차표를 사는데 써버렸고,

이제 아이가 태어나면 돈을 모으기는 더 힘들어질테고.

하지만 여자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으니까, 결국 그들은 다시 식당으로 돌아갔어.

그리고 같은 생활이 계속되었어. 일을하고, 팁을 모으고, 살림은 늘어갔지.

여자는 이제 마을 사람들하고도 친해져서 그 소박한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남자는 가끔 언덕에 올라가서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바라보곤 했어.

돈은 쉽게 모아지지 않았어. 좀 모아졌다 싶으면 꼭 필요한 곳이 생겼지.

그리고 아기가 태어났어."

 

"곰스크는 물건너갔군."

그가 다시 맥주를 마셨다.

 

"그 작은 마을에, 학교가 하나 있었어. 그 학교에는 선생님이 딱 한사람 있었는데,

그는 이제 너무 나이가 들어서 학생들을 계속 가르칠 수가 없게 되었어.

교장선생님이자 선생님인 그가 여자에게 말했지.

당신 남편이 자신의 일을 물려받을수 없겠냐고.

그러면 학교에 딸린 사택에서 살수도 있고, 월급도 받을수 있다는거야.

여자는 정원이 딸린 그 작은 사택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

남자는 처음엔 반대했지만, 손님들의 팁을 모으는 것보다 월급을 받는 쪽이 나을것 같아서.

결국 그 학교를 맡게 되었지. 남자와 여자와 아이는 그 집으로 이사를 했고,

그들은 그곳에서 쭉 살게되었어."

 

"그게 끝이야?"

 

"응. 하지만 한가지 이야기가 더 남아있어.

남자는 어느날 자신에게 학교를 물려준 교장선생님과 같이 술을 한잔 마셨어.

교장선생님은 남자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그는 남자에게 이런 말을 했어.

나도 곰스크로 가고싶었다네. 결국 이곳에서 삶을 마치게 되었지만."

 

그가 빈 술잔을 채웠다.

 

"그리고 소설은 남자의 독백으로 끝나.

나는 아직도 곰스크로 가는 기차표를 사기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

 

꽤 긴 침묵이 흐른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남자, 불행했을까?"

 

"넌 어때?" 대답대신 내가 물었다.

 

하하, 하고 그가 짧게 웃었다.

 

"나쁘진 않지?" 내가 다시 물었다.

 

"그래, 나쁘진 않아." 그가 대답했다.

 

"아직도 곰스크로 가고싶어?" 내가 물었다.

 

"글쎄.. 아마 그럴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너무 늦었겠지."

 

"...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넌 아이가 둘이나 있으니까." 나는 웃었다.

 

"하지만 아이 때문에 행복하지?"

 

"그래."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너는 줄곧 내게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겠지?"

 

"응. 하지만 안해도 상관없어. 새로운 이야긴 아니잖아.

어쩌면 나보다 네가 더 잘알고 있는 이야기이고." 내가 말했다.

 

"기차에서 내리지 않았으면 곰스크로 갈수 있었을까?"

그가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겠어. 인생에는 어차피 여러가지 일들이 생기는 거니까.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소중하고 가치가 있지 않을까?" 내가 대답했다.

 

"네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뭐야?" 그가 물었다.

 

"그이야기에서 남자와 여자의 입장은 늘 바뀌는 거라고 생각해.

때로는 남자가, 때로는 여자가 서로의 발목을 잡기도 하고, 곰스크로 가자고 끌어당기기도 하고,

또는 가족이, 친구가, 사회가, 절망과 희망을 던져주기도 하겠지.

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별로 없어.

다만 오래전에 읽었던 그 소설이 내마음속 어딘가에 가라앉있다가, 가끔 선명하게 떠오른단거지.

마치 아무런 위험도 없어보이는 사화산이 갑자기 폭발하듯이.

그럴때면 난 불에 데인듯이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곰스크, 라고 말하게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 봄이야 그렇지?" 그가 물었다.

 

"응, 봄이야." 내가 대답했다.

 

- 황경신의 초콜릿우체국"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