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곡을 찌르는 지혜

정곡을 찌르는 지혜

정곡을 찌르는 지혜

1. 사랑의 각본
첫눈이 쏟아지는 겨울날 저녁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있는 한 쌍의 연인 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여자가 외투를 벗어 남자에게 걸쳐 주며 "자기 춥지?" 하고 남자의어깨를 토닥거린다면 그것이 달콤한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십중팔구 장난이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남자가 모욕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을것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외투를 걸 쳐 준다면 누구의 눈에도 그저 열렬한 사랑에빠진 연인이 하는 당연한 행동이 된다. 이런 예는 비일비재하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 할 스웨터를 뜨고 있는 광경은 코미디에서나 볼 수 있는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결혼해 달라고, 행복하게 해주겠노라고 장미꽃을 들고 무릎을 꿇은 여자의 모습은 어떤가? 역시 마찬가지로 코미디가 되어 버린다. 남자를 보고 정욕에 불타 강제로 옷을 벗기는 여자나, 정조를 잃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책임질 것을 호소하는 남자 모두 상식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에 빠지거나 섹스를 할 때도 서로에게 기대하는 역할 모형, 즉 기대하는 각본이 있다고결론을 내려도 무방할 것이다.

(* 전미영,여난영(1995). 내 사랑엔 내가 없다. 김출판사. 중에서)

2. 삶은 순정, 아니면 연기, 그도 아니면 오버액션?
디드로는 '배우에 관한 역설'에서 일상적이면서 흥미로운 한 편의 일화를 제시하고 있다. 한 남자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드디어 심각한 고백을 털어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감정적인 사람이라 언제나 벌벌 떨면서 사랑하는 대상에게 다가가곤 한다. 심장은 벌렁거리고 생각들은 뒤죽박죽이 되고, 목소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말하는 내용들은 뒤죽박죽이 되고, 목소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말하는 내용을 망쳐버리곤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스꽝스러운 자신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더욱더 버벅대기만 한다. 그런데 그 여인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모종의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남자가 개입한다. 그는 재미있고 가벼우면서도 스스로를 잘 통제할 줄 알고, 자기 자신을 잘 즐길 줄 알고, 또 칭찬할 수 있는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으며, 그것도 아주 섬세하게 칭찬하고 웃기고 즐겁하는 행복한 사람이다. 둘 가운데 누가 아름다운 여인의 선택을 받았을까?



감정의 밀도와 순수성에 의해 사랑이 선택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여인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순정이나 열정보다는, 오히려 순정이나 열정이 결여됨으로써 생겨나는 세련되면서도 쿨(cool)한 태도들이 사랑을 얻는 열쇠가 된다. 꾸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벌거벗은 열정이 왜 퇴짜를 맞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연기력 부족! 순정보다는 연기력이 사랑을 얻는 상황이 지배적인 현실이라면,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감정을 끊임없이 객관화·탈낭만화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은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내용은 뻔한 대본을 가지고 연기하는 배우이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연기를 보며 한없이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관객이다. 방정식은 단순하다. 배우가 관객에게 무심할수록 탁월한 연기를 펼칠 수 있다. 무심한 배우의 탁월한 연기는 관객의 순정 어린 반응을 이끌어낸다. 순정과 열정에 휩싸인 관객은 오버액션을 펼쳐 보이는 배우가 된다.

(* 김동식(2002). 연기(演技/延己)하는 유전자의 무의식에 대하여. 은희경 소설집 '상속'의 해설 중에서)

3. 소나기가 아니라 이슬비
사귀고 싶은 여자가 주위에 있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남자 분들에게 나는 이렇게 조언한다. '소나기처럼 퍼붓지 말고, 이슬비처럼 스며들라'고. 요즈음 젊은 여성들은 대부분 친구 같은 사랑을 원한다. 즉,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사랑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니 성공률을 높이려면 그러한 여성의 심리에 맞는 방식으로 다가가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대다수의 여자들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백마를 타고 나타나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자신을 외로움의 성에서 구출해 줄 기사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기는 하다. 여자들의 마음이 그렇다고 하여 당신이 마치 그 기사인 양 행동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실패의 쓴맛을 보게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당신은 왕자가 아니므로 타고 갈 백마가 없기 때문이다.



설령 당신이 객관적으로 보아 꽤나 괜찮은 남자라 할지라도 여자들이 환상 속에서 그리고 있는 기사 만큼일 수는 없다. 당신이 내 말을 안 듣고 그녀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사랑을 받아주십시오"라고 용감하게 고백했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대방 여성은 잠깐동안 황홀 지경에 빠질 것이다. 자기를 사랑한다는데 황홀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비록 상대방이 백마 탄 기사는 아닐지라도 누군가로부터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일생 중 몇 번 있을까 말까한 가슴 벅찬 일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이 그녀를 황홀하게 만들 수 있는 시간은 그저 '잠깐동안' 뿐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백마를 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밝혀지게 되므로. 따라서 그 시간은 길어야 몇 분, 짧으면 몇 초간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바로 그 다음은 상대방의 좀 더 긴 시간동안의 '당황'이고, 또 그 다음은 훨씬 긴 기간 동안의 '고민'과 '부담감'이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그 다음은 여자가 결단을 내려야 할 차례가 되기 때문이다. 남자로부터 "나의 사랑을 받아 주십시오"라는 고백을 들었으면, 곧 "네, 그러겠어요."라든가, 아니면 "아니오, 안되겠는데요."의 어느 한 쪽으로 대답을 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여자들은 그 결단을 내리기를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 결단이 어디 보통 결단인가?


"아니오"라고 거절하자니 그건 그것대로 상대방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그나마 나를 사랑했던 한 사람의 나에 대한 호의를 중단하게 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썩 마음이 내키는 일일 수만 없다. 그렇다고 "예"라고 수락하자니 그것은 더더욱 간단하지 않다. 이 사람이 정말 나에게 맞는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확신부터도 갖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수락한 이후의 일을 예상해 보면 거기에 따른 부담이 결코 적지 않은 것이다. 상대방의 사랑을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하고 나면 그때부터 그 사람과 나는 커플이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와 같이 그의 은근한 친절과 호의를 모르는 척 받아주기만 하면 되는, 약간의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더할 나위 없이 편하기만 했던 시절은 이제 끝나는 것이다.




사실 상대방의 사랑 고백을 수락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그의 일방적인 호의에 대해 이제부터는 나도 응분의 보답을 하겠다는 약속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그것이 꼭 남는 장사만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가 서로 만나기로 한 이후에도 그가 지금까지와 같이 변함 없이 나를 사랑해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 있는가? 사람들이 통상 이야기하기를 여자가 너무 호락호락해서는 안 된다고들 하며, 남자들은 처음에는 잘해주다가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달라진다고도 하지 않는가? 게다가 그 사람이 만약 성급하게 육체적 요구를 하기라도 하면 또 어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쯤이면 여자는 사랑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겁나고 불안한 일임을 달라진다고도 하지 않는가?
이래서 처음에는 "예"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사람도 시간이 갈수록 두려움이 커져서 결국은 "아니오"라고 말하기가 쉽고, 그래서 성급하게 사랑 고백을 했던 남자는 또 가슴 아픈 실패를 한번 더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나는 여전히 그녀가 좋고 갈수록 짝사랑은 깊어만 가는데? 물론 언제까지나 혼자 끙끙 앓고 참을 수만은 없다. 표현을 하기는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조속한 결단을 요구하는 방식이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당신을 사랑합니다"하고 어느 날 갑자기 직접 혹은 편지(이메일)로 고백하는 방식이나 느닷없이 꽃이나 값비싼 물건을 선물하는 등 충격적 방법은 상대방 여성을 당황하고 부담스럽게 하여 실패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아 있는 방법은 속전속결보다는 은근과 끈기를 무기로 하여 장기전으로 돌입하는 것뿐이다. 더구나 당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멀리 있는 것도 아니요 바로 당신 주위에 있다면 더욱이 그러하다. 그런 상황에서 당장 결판을 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여자의 주위에서 꾸준히 나의 매력과 장점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기회가 몇 번은 꼭 오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다가 다른 사람에게 뺏기는 것이 아닐까'하는 초조감을 이기는 인내심과 그 사람 앞에서는 자꾸 당황되고 부자연스러워지고, 심지어 위축되기도 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억지로라도 자연스럽고 당당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연기력이 필요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소나기처럼 퍼부어서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일반적으로 예후가 좋지 못하다. 왜냐하면 소나기처럼 이루어진 사랑은 천둥처럼 깨어지기도 쉽기 때문이다.


성급했던 사람들 중에는 얼마 안가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텐데...' 하고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 '그때 그렇게 촐싹거리지만 않았더라도, 그래서 서로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쯤은 기회가 올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급한 청춘들에게 이번에도 또 실행하기 어려운 주문을 한다. 그대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녀에게 소나기처럼 퍼붓지 말고, 이슬비처럼 스며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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