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바느질로 쓴 거대한 일기장


네모난 작업실을 묘한 공기로 채워 넣은 것은 리키 리 존스(Ricky lee jones)의 음악이었다. 조용히 읊조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이 사각의 공간을 붕~ 띄워 마름모 모양을 만들었다가, 사다리꼴로 바꾸기도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여기는 다시 네모난 작업실. 신비로운 꿈을 꾸고 난 것처럼 이상한 기분에 둘러 싸인다.
그렇다고 이 묘한 기분이 불편한 감을 주었던 건 아니다. 작업실 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업물들이 공간을 커다란 쿠션처럼 폭신하고 편안하게, 심지어는 나른한 느낌이 들도록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 놓고선 능청스럽게 대롱대롱 매달려있거나 얌전히 앉아있는 소품들. 이를 보고 어찌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을까.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그림을 그리고 생활 소품을 만들고, 자신의 일기가 담긴 오브제를 완성해가는 전재은 작가의 오묘한 네모 공간, 그 구석구석 예쁜 생활 소품들이 가득한 그녀의 작업실을 구경하고 왔다.

취재 | 김유진 기자 (egkim@jungle.co.kr)
그 곳에 가려면 ‘나름대로’ 고속도로를 지나야 한다. 널찍한 도로들과 높게 뻗은 분당의 아파트 사이로, 낮은 상가건물에 붙어있는 고양이를 찾으면 된다.
빨간 문에 딱 붙어 있는 까만 고양이는 낮잠을 자고 일어난 듯 몸을 쭉 늘여 기지개를 펴고 있다. 고양이의 얄궂은 표정을 보니 작업실을 찾은 손님들에게 자신의 자태를 뽐내려는 모양이다.
겨울의 찬 공기가 들어올세라, 안쪽의 손잡이를 잡고 문을 닫으려고 보니 왠 걸, 그 폼 재던 고양이가 부시시한 얼굴로 웅크리고 있는 게 아닌가. 작업실의 따뜻한 기운을 온 몸에 받은 탓일까. 그 고양이는 어느새 한창 꿈나라다.
그렇게 들어선 작업실의 공간은 아담했다. 어떤 복잡한 구조 없이 바닥과 천장, 그리고 수평으로 둘러싼 네 면까지 딱 육면체다.
전반적으로는 책상, 책장, 바닥, 천장 등 나무 느낌이 나는 소재로 통일감을 주어 자칫 심심할 수 있는 작업실 구조에 온기를 불어넣었고, 작업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될 법한 물건들은 작업실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자유를 허락 받아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전재은 작가에게 이 작업실이 생긴 건 2004년 가을. 2002년 함께 ‘봉인된 일기’라는 이름으로 2인전을 열기도 했던 하인선 작가와 공동 작업실을 사용하다 하인선 작가가 잠시 외국에 가게 되면서, 혼자만의 작업 공간을 만들게 되었다.
“어떤 작가가 서재에 오면 자신의 영혼을 되찾은 것 같다고 하더군요. 작업하는 사람들에게 작업실도 바로 그럴 거에요. 영혼을 두고 왔다 가는, 나를 찾는 공간이요.” 그녀에게 작업실은 이랬다.

1층이라는 위치 덕분에 창 밖에 바로 보이는 나무들로 사계절의 아름다운 변화를 하루도 놓치지 않고 감상할 수 있어 좋다는 전재은 작가는 한 곳에 있어도 마치 여러 곳을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 곳이라며 깊은 만족감을 표시했다.

전재은 작가의 말 대로라면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각각의 매력이 있을 터인데, 성급하게 ‘겨울에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작업실은 신비롭고 포근했다.
그렇다고, 작가가 만들어내는 오브제들의 소재나 바느질 작업이 주는 느낌을 포근함의 이유로 들고 싶지 않다. 작가 스스로도 자신이 주로 사용하는 천이나 실 같은 소재가 단지 따뜻함만으로 이해되기를 거부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녀의 작품 자체가 지닌 생명력을 믿어서다.
고양이 얼굴로 만들어진 장식물이나, 엉뚱하게도 큰 대자로 서있는 인형들은 사람과 무언의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건 소재로 느껴지는 따뜻함 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다.

전재은은 바느질을 하는 작가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녀가 1998년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도, 그녀는 회화 작업뿐만 아니라 바느질을 이용한 드로잉 작업을 선보였었다. 캔버스에 씌운 천 위에, 그림을 그리듯 작업한 바느질 드로잉은 그 이후 전재은 작가의 작품 이력을 예견한 작업이 된 셈이다.
그녀가 바느질을 작업의 도구로 활용한 것은 가사의 상징, 전통적인 여성상 등 바느질에서 뽑아낼 수 있는 전형적인 의미 때문이 아니다. 바느질로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간혹 페미니즘으로 규정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작업은 오히려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로서 바느질의 다층적인 효율성에 주력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전재은 작가는 바느질이라는 행위 자체가 작업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바느질이라는 아날로그적인 행위, 그 작업물에서 느껴지는 모던한 형태 혹은 그러한 가능성, 물감 등 다른 도구에서 얻을 수 없는 깔끔함, 축소와 확장을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는 부피감. 이 모든 의도 혹은 우연이 그녀가 바느질로 작업을 하고, 바느질로 이야기하는 이유다.
바늘, 그리고 바늘을 꿰어야 할 원단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작업할 수 있다며 사실 바느질처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는 작업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작가는 지하철이건, 사막이건, 집이건 어디에서도 가능한 바느질 작업에 유목민적인 느낌을 받기도 한다고.
회화와 도구만 다를 뿐임을 강조한 그녀는 도구와 행위 자체가 자신이 표현하려는 이야기와 닮아있는 바느질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전재은 작가의 작업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집’. 작업실에 군데군데 매달려있는 집 모양은 그녀가 오랫동안 이야기의 재료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차곡차곡 바느질 한다는 그녀에게 그 작업으로 구체화된 집은 작업이자, 어린 시절이며, 그녀 자신이자 그녀의 일기가 된다. 그래서 전재은 작가는 ‘집’을 그녀의 심리적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99년 갤러리 보다의 개인전이나, 2000년 까페 갤러리의 ‘치유를 위한 옷장’전, 2002년 하인선 작가와의 2인전 ‘봉인된 일기’까지 그녀의 집 혹은 심리적 공간은 여러 전시를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다.

‘집’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 건 2005년 11월 갤러리 알트에서 있었던 4회 개인전 ‘시간의 집’이라는 전시에서다.
‘행복을 향한 의지’라는 작품은 날개를 단 집의 모양새인데, 집은 날개를 달고 있지만 정작 그 날개는 짙은 그림자와 함께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행복을 위한 힘든 과정, 이를 거쳐 행복을 쟁취했을 때, 과연 그 행복은 얼마나 영원할지, 그리고 그 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인지를 되묻는 작품이다.
거즈를 이용한 소재가 특이한데, 이전 작업에서도 꾸준히 사용해왔던 거즈에 대해 전재은 작가는 이 소재가 가진 섬세하고 여린 느낌이 마치 사람의 마음속을 보는 것 같았다는 말을 더했다.

“구체적으로 바느질이라고 말하든, 전반적인 작업을 아우르든, 저에게 작업은 시간을 축적해서 얻어낸 결과에요. 동시에 반대로 저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것이죠. 설치작업이라는 형태도 전시가 끝나면 소멸되고 없어지잖아요. ‘시간의 집’은 저에게 그런 의미였어요.”
‘쌓아서 남는 것보다는 소멸시키고 없애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 같다’는 철학을 펼친 작가는 이번 전시로서 집에 대한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Jungle : 작업은 주로 언제 하는가.
가정에 매어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 정도까지 작업실에 나와서 작업을 한다. 하지만, 감성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그대로 작업에 반영되는 고요한 밤을 선호한다. 그래서 때로는 밤에 나와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때는 마음과 바느질이 일치되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Jungle : 많은 작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드로잉이나 다른 작품들을 보면 소재가 다양하다는 생각이 든다.
페인팅이건 바느질이건 나의 일기를 쓰듯 작업해왔다.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글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 이야기만 작업에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껏 전시가 일기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점차 경험, 일상, 공간에 대한 환상, 소설, 영화 등 그때마다 느낀 것을 작업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Jungle : 서양화를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회화에서 생활 소품을 만드는 바느질로 작업의 형태가 바뀌었는데, 이 점에 대해서 설명을 해준다면.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때로는 예술의 벽이 높게 느껴질 때가 있다. 작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순수미술이건 소품을 만드는 일이건 모두 소중한 작업이지만, 이 작업을 대하는 사람들이 보다 손쉽게 반응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디자인 영역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Jungle : 앞으로 작업은 어떤 방향이 될 것인가.
A4 용지로 작업하는 Peter Callesen의 작업을 보고 매우 놀라웠다. 작업실 벽에도 전시 리플렛을 붙여 놓았다. 이렇게 가벼운 소재로 커다란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 인상 깊다.
나 역시 이런 맥락에서 가벼운 소재로 작업하고 싶다. 내가 사용하는 가볍고 디테일 한 소재로 작업의 무형적인 가치를 드러내고 싶다.

시간은 흐르지만 공간은 쌓인다. 전재은의 작업실에서 느낀 것은 이 자명한 명제였다.
그녀는 흐르는 시간을 바느질로, 그 외의 다양한 작업으로 축척해 놓았다.
그 작업들이 물리적으로 차곡차곡 쌓여가는 작업실은 전재은 작가의 거대한 일기장이다.

작업하는 것 보다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는 전재은 작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단순히 그녀의 작업을 따뜻함, 포근함으로 분류할 수 없음에도 작업들이 한 가득 담긴 작업실에서, 혹은 작업실의 사진에서 그런 느낌을 가졌다면, 전재은 작가 자신을 담은 그 거대한 일기가 따뜻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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