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기 서론
1. 성경의 수면제인가?
1.1 남의 족보
역대기상하를 읽어보면 처음부터 독자들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처음부터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이름이 실린 족보가 나오는가 하면, 그 분량도 9장이나 되어서 처음 읽는 독자들을 졸립게 만든다. 더욱이 이것으로도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지, 어떤 명단(예를 들어 베냐민 지파의 족보)은 같은 내용을 반복하기도 한다. 따라서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역대기를 "성경의 수면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물론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약간의 흥미를 갖게 되긴 하지만, 곧 바로 다시 성전 건물과 성전 예배에 관한 상세한 묘사나,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반차가 나열된다. 이러한 일로 인해 고고학-역사적인 관심을 가진 이가 아니면, 또 다시 역대기에 대해 흥미를 잃게 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지루한 보고가 끝나고, 분열 왕국 스토리로 들어가면서 다시 한번 기대를 걸어본다. 그러나 흥미진진한 이야기 거리가 될 수 있는 북방 이스라엘 왕국의 사건들이 무시되어 더 이상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
1.2 환상적인 아라비안 나이트
게다가 언뜻 보면 역대기는 "환상적이고 회화적인 스토리 전개"로 인해 이스라엘의 "아라비안 나이트"와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역대기 기자의 숫자 사용은 환상적으로 보인다. 첫째로 이스라엘의 군대의 숫자는 현대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에 주둔한 여호사밧의 상비군은 다섯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 부대는 제 1부대 30만명, 제 2부대 28만명, 제 3부대 20만명, 제 4부대 20만명, 그리고 제 5부대가 18만명이었다. 이를 모두 합치면 상비군의 숫자가 116만명이나 되는데(대하 17:14-18), 철기 시대에 예루살렘에 이렇게 많은 부대가 주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여호사밧이 100만명이 넘는 군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라고 부르짖은 것이다(대하 20:12). 그뿐만이 아니다. 아비야의 군사 40만명과 여로보암의 군사 80만명이 대결한 전쟁에서 여로보암 측의 전사자는 무려 50만명이나 되었다(대하 13:3,17). 이러한 환상적인 숫자는 아사의 58만명의 군대가 구스 사람 세라의 군대 100만명을 한 명도 남겨 놓지 않고 학살했다는 데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대하 14:8-9,13). 한 번의 전쟁에 전사한 군인의 수가 중화기로 전쟁을 하고 수년간 계속된 한국 전쟁 때 죽은 수만큼 된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으로 보인다. 따라서 과거의 비평주의 학자들은 역대기 기자가 이스라엘이 실제 전쟁을 해 본 경험이 없는 시대에 환상적인 태도로 역사를 과정했으며, 심지어 없는 내용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3 사무엘서와 열왕기의 재탕인가?
역대기를 무시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역대기 본문의 약 50%가 사무엘서와 열왕기에 나오는 본문들과 일치한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무심코 읽으면 역대기는 사무엘-열왕기의 재탕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구 헬라역과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는 역대기를 "빠진 것"이란 뜻을 가진 "파랄레이포메논"(Paraleipomen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마도 이 명칭은 역대기가 사무엘과 열왕기에서 언급되지 않고 빠진 것을 보충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그 동안 역대기의 가치와 독창성을 크게 인정하지 않았으며, 교회 안에서도 역대기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물론 유대인들은 대속죄일에 역대기에서 발취하여 낭독하였기 때문에 역대기가 완전히 무시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역대기는 교회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무시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1.4 역대기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렇다면 과연 역대기는 족보 투성이의 케케묵은 남의 이야기이며, 환상적인 아라비안 나이트이고, 사무엘-열왕기의 재탕에 불과한가? 그렇지는 않다. 최근에 들어서 역대기는 구약 시대의 마지막에 기록된 책으로 구약 전체의 사상이 가장 잘 요약된 기록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첫째로 역대기는 족보들로 가득한 죽은 사람드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역대기를 기록할 당시에 역대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원래 독자들에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마른 뼈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역대기가 주전 4세기에 기록되었다면 역대기에 기록된 역사는 이미 오래 전 옛날 스토리인 셈이다. 주로 바벨론 포로 이전의 유다 역사를 담고 있는 역대기는 바베론 포로라는 거대한 심연을 사이에 두고 첫 독자와 마주 앉아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역대기 기자와 왜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역대기 기자는 소생되어야 할 마른 뼈들은 역대기 속의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역대기를 읽은 독자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진정한 생명의 바람을 필요로 하는 마른 뼈들은 당시에 역대기를 읽던 독자들이었으며, 또한 우리들이었다.
둘째로 역대기의 환상적으로 보이는 숫자나 과장을 근거로 역대기의 신빙성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역대기의 숫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학자들은 원래 1,000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엘레프"가 때로 1,000명보다 작은 전투 단위 부대를 가리킬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116만명이나 된다고 기록된 여호사밧의 군대는 총 1,160부대가 되어 어느 정도 그 숫자를 경감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 부대를 100명이나 50명으로 보더라도 예루살렘에 거주한 여호사밧의 군대는 58,000명, 또는 110,000명이나 된다. 사실상 이것도 많은 숫자이다. 그러므로 멘덴할(Mendenhall)은 1,000을 가리키는 "엘레프"가 5-14명의 부대 단위를 가리킨다고 주장하여 숫자를 크게 감소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숫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대기 저자는 숫자를 사용해서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숫자를 줄이는 것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항상 역대기의 숫자가 사무엘-열왕기의 숫자보다 큰 것은 아니다. 양자의 숫자가 명백하게 불일치하는 17번의 경우에서 5번은 역대기의 숫자가 낮다. 역대기의 숫자는 어림으로 잡은 수자일 수도 있고, 상징적인 숫자일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세라의 100만 군대는 단순히 많은 숫자의 군대를 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숫자가 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역대기의 신빙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셋째로 역대기는 단순히 사무엘-열왕기의 재탕이 아니다. 우선 사무엘-열왕기와 동일한 부분에서도 그대로 복제하고 있지 않다. 뒤에 부록에서 자세히 살피겠지만, 역대기 기자는 "조화, 첨가와 보충, 생략, 모형론" 등을 사용해서 사무엘-열왕기를 주해함으로 이전의 성경을 자신의 시대에 살아있게 만든 해석자였다. 이러한 점에서 역대기는 이전의 정경 자료를 이용할 때에도 나름대로의 신학적 관점을 드러낸 탁월한 주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나머지 사무엘-열왕기와 동일하지 않은 50%의 자료는 역대기 기자가 스스로 첨가한 것이다. 역대기 저자는 독자적으로 첨가한 50%의 새로운 내용과 이전의 자료를 적절한 방법으로 첨삭함으로 그 내용을 풍성하게 하고 잇다. 사실상 역대기 기자는 인류의 최초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포괄적인 안목을 가지고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역대기 저자는 이렇게 포괄적인 자료들 중에서 수많은 자료들을 생략하고 원하는 일부 자료를 선택했다. 사무엘-열왕기 시대와 동일한 시기를 다룰 때에도 그 책들을 참고하면서 자유롭게 자료를 첨삭했을 것이다. 따라서 역대기를 단순히 사무엘-열왕기를 보충한 것으로 생각해 온 과거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역대기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구약 역사서의 전체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마가복음과 요한복음만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시도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역대기는 여호수아-열왕기의 책들이 다루는 시대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들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대기를 제대로 읽어야만 한다.
1.5 설교로서의 역대기
그 동안 교회 역사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역대기는 사무엘-열왕기를 보충하는 부록 역사나, 사무엘-열왕기와는 다른 관점으로 쓴 대안 역사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역대기 기자의 역사적 관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가 명시적으로 32개의 출처 자료를 언급한 점은 그의 역사적 관심사가 적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역사적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인애를 믿고 신앙으로 돌아올 곳을 호소하는 설교적 관심을 더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물론 역대기를 설교로 규정한다고 해서, 이것이 레위인들이 설교한 것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단지 역대기는 단순한 역사 기록이나 신학적 에세이가 아니라, 교훈적 성격, 즉 케리그마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설교로 부르는 것이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부록을 참고하라. 구약 시기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역대기는 이전 구약 책들에서 발전된 모든 신학 사상들이 거의 다 나타난다. 시몬 드프리스(Simon DeVries)는 역대기를 "모든 성경에서 가장 풍성한 영성의 광산"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그가 이렇게 주장했는지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2. 배경
2.1 흥분과 기대
역대기상하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지 100여년이 지난 후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공동체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로는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료들은 근거로 해서 역대기 기자가 살았던 당시의 공동체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에스라서를 보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최초의 공동체는 경제적, 정치적 비젼을 지난 공동체가 아니라, 종교적 비젼을 지난 공동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고레스의 칙령을 따라 바벨론에서 돌아온 성전-건축자들의 공동체였다.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스 1:3)" 비록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포로 후 공동체는 다윗 왕가의 후손인 세스바살과 스룹바벨, 아론계 제사장 후손인 요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인도를 받아 다리오 왕 6년(주전 516년)에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학개와 스가랴는 놀라운 예언을 선포했다. 학개는 주전 520년경에 성전 재건을 촉구하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학 2:6,7,9,21-22)."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스가랴 선지자도 남은 자들에게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예고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슥 8:23)."
이러한 메시지들은 매우 어려운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흥분을 일으킬만한 메시지였다. 이때는 개척자가 되어 옛 땅에서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애를 쓰던 때였으며, 예루살렘 성보자 없는 상황에서 선전을 건축하려고 했던 때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학개와 사가랴의 메시지는 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에 기대와 소망을 불러일으킬만한 것이었다.
2.2 실망과 좌절
그러나 성전이 지어지고 나서 이와 같은 기대는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다윗 가문이 시들어졌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별 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아하수에로 왕 때에 하만으로 인해 유다 공동체는 큰 위기에 빠졌다. 이로 인해 유다 공동체는 점차 사기가 낮아졌으며, 점차 냉소적이 되어 갔다. 우리는 이를 말라기의 예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끝났다고 불평을 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말 1:2)."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말 2:17)."
우리는 이러한 말라기의 내용을 통해서 당시 포로 후 공동체가 얼마나 영성이 약화되었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있느냐?"고 부르짖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상해보라! 어떻게 이보다 더 냉소적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등장과 이들의 개혁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던 공동체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성전을 봉헌한 지 약 74년이 지난 주전 458년에 포로 이전 예루살렘에서 봉사했던 대제사장 가문의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스 7:6)로서 "여호와의 율법"을 포로 후 공동체의 삶의 원리로 정립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또한 에스라보다 13년 늦은 주전 445년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초기의 유다 공동체는 지도자들과는 달리 느헤미야의 관심은 유다 공동체 자체와 예루살렘시 자체의 재건에 있었다. 그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이 일을 감당했으며, 이로써 예루살렘 성벽에 세워지고, 예루살렘은 다시 여호와의 도시로 회복되게 되었다.
2.3 성취의 지연
"거룩한 백성"의 대표적 일부가 포로에서 귀환하였고(스 9:2), "거룩한 성전"(대상 29:3)과 "거룩한 도시"(느 11:1)가 재건되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말한 큰 영광은 커녕 과거의 영광을 회복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남은 자들 가운데에서 영광 중에 수립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점차로 사라져 갔다. 페르시아의 권력(주전 550-331년)은 무너질 줄을 몰랐으며, 느헤미야 당시에 불과 5만에 불과했던 예루살렘 공동체는 이를 무너뜨릴만한 힘이 없었다. 실제로 이 공동체는 계속해서 200년 동안 페르시아 왕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르시아 연대기 | ||
왕 |
연대(주전) |
비고 |
고레스 |
550-530 |
고레스칙령(538), 바베론 포로귀환 |
캄비세스 |
530-522 |
성전건축재개(520) |
다리오 1세 |
522-486 |
성전완공(515)-마라톤 전투에서의 패배(490) |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
486-465 |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활약 |
아닥사스다 1세(롱기마누스) |
465-424 |
에스라 귀환(458), 느헤미야 귀환(445) |
다리오 2세 |
424-404 |
|
아닥사스다2세(므네몬) |
404-358 |
|
아닥사스다 3세(오쿠스) |
358-338 |
|
아르세스 |
338-336 |
|
다리오 3세(코노두만누스) |
336-331 |
가우라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더에게 멸망(331) |
그러는 동안 포로 후 공동체는 점차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상실하고 있었다. 학개, 스가랴 선지서와 느헤미야서를 읽어보면 당시에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 율법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가 얼마나 적었는지를 알 수 있다.
2.4 과거와의 관계
역대기가 기록될 때에 이스라엘의 상황은 이러했다. 이스라엘은 세계 역사의 썰물과 밀물에 완전히 떠밀려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세계 역사의 중심은 바벨론이나 페르시아와 같은 대제국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아직도 여호와의 선택한 백성이란 말인가? 언약은 아직도 유효한가? 아직도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세우시기 위해 여호와께서 일하시고 계신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해서 심각한 질문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이스라엘 때와 같이 지금의 포로 후 공동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계시는가? 포로후 공동체에는 다윗 계열의 왕이 없었고, 바사에 굴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은 포로후 공동체에게 의미가 있는 일인가? 엄청난 심판(다윗 계열의 왕위 폐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포로됨)이 내려진 후에, 지금의 이스라엘은 옛날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포로후 공동체는 신앙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신앙적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바로 역대기였다.
3. 역대기의 3부 구조
역대기를 읽어보면 역대기의 구조는 아래와 같이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족보: 창조부터 회복까지(아담부터 포로 후 시대까지: 대상 1-9장)
중심주제: 이스라엘의 원래적 통일성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이스라엘의 보존
2. 통일왕국 시대의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대상 10-대하 9장)
중심주제 1: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말씀(대상 7:3-14)-영원한 왕조에 대한 약속
중심주제 2: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대하 7:12-14)
성전봉헌에 대한 응답으로 이스라엘을 용서하고 회복해 주시겠다는 약속
3. 분열왕국 시대의 유다 왕들의 통치(대하 10-36장)
중심주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루시는 기본 원리
3.1 바깥 틀
역대기의 큰 틀은 창세기를 요약한 족보(1장)와 에스라-느헤미야서에서 인용한 고레스 칙령(대하 36:22-23)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틀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첫째 창세기와 에스라-느헤미야서는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과 끝을 가리킨다. 히브리 전통의 구약 성경에서 역대기를 제외하면 이 두 권의 책은 첫 번째 책과 마지막 책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역대기는 창조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역사의 끝까지 모든 역사를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창조와 성전 재건이 역대기를 감싸는 전체 틀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는 재건된 성전이 아담 안에서 인류 창조 이후 계속된 하나님의 중요한 관심사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에스라-느헤미야서의 포로 귀환민의 명단(느 11:3-19)이 역대기의 첫 번째 주요 단락인 족보 단락의 끝(대상 9:2-17,22)에 동일하게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아담 안에서 인류 창조와 성전 재건이 족보 전체의 단락을 감싸고 있는 모습은 역대기 전체의 서두와 결미와 상응한다. 어찌되었든간에 결국 족보 단락만 염두에 두면 창조로 시작해서 포로 귀환 명단으로 끝이난다. 이 귀환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을 지으라는 고레스 칙령(대하 36:22-23)을 따라 성전을 재건한 장본인들이다. 이렇게 되면 족보 단락은 창조에서 시작해서 성전을 제건한 장본인들로 끝이 나는 셈이다. 이런 구조는 재건된 성전이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면서 시작한 사역의 지속, 혹은 회복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전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창조 이래로 이스라엘과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 안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기를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사무엘-열왕기는 역대기 기자가 그리고 있는 창조 이후 거대한 인간 역사 드라마의 한 장-물론 중요한 장이지만-에 불과한 것이다. 역대기의 지평선은 이렇게 넓은 것이다.
3.2 중심 단락
두 번째 단락은 흔히 다윗의 통치(대상 10-29장), 솔로몬의 통치(대하 1-9장)로 세분되기도 하나, 최근에는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를 한 묶음으로 묶어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역대기에서 가장 많은 지면은 차지하고 있는 단락은 바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담고 있는 이 중앙 단락이다. 다윗과 솔로몬이 차지하고 있는 분량(28장)은 나머지 18명의 왕에 할애된 분량(27장)과 맞먹는다. 우리는 이러한 분량을 통해 보더라도 역대기의 주요 메시지가 이 중앙 단락에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말씀(대상 7:3-14)과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대하 7:12-14)은 역대기의 신학적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말씀(대상 17:3-14)은 흔히 다윗 언약으로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하사하실 것이며, 그 후에 그의 후손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봉헌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또 네 모든 대적으로 네게 복종하게 하리라.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울찌라. 네 수한이 차서 네가 열조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저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자비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영영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대상 17:10-14)."
둘째,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대하 7:12-14)은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한 데 대한 응답으로 주어졌다. 이 내용 중에는 비록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자기 땅에서 쫓겨나고 성전이 파괴되는 일이 있더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용서하고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대하 7:12-14)."
결국 이 두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 헌신을 강조할 뿐 아니라, 기도의 집으로서,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의 상징으로서 성전의 중심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다. 역대기 안에 이 두 말씀이 중요하다는 것은 병행 본문인 사무엘-열왕기와는 달리 이 주제들과 핵심 어구가 반복된다는 데 있다.
(1) 다윗언약: 대상 22:6-13,28:2-10, 대하 6:4-11,15-17,13:5,8,21:7,23:3,36:23.
(2) 회복의 약속: 대하 12:5-12, 13;13-18, 20:1-30, 32:24-26, 33:10-33
이렇게 보면 다윗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삶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하사하실 것을 약속하셨고, 솔로몬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언약에 신실하시다면 이스라엘은 포로 후에도 희망을 가질 수가 있다. 바로 이러한 언약과 약속이 이스라엘의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3.3 결론 단락
결국 이와 같은 언약과 회복의 주제는 역대기의 역대기의 마지막 주요 단락인 (대하 10-36장)에 선언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이러한 기본 원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응용될 수 있는지 다양한 예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르호보암과 므낫세가 기본원리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예로 등장하고 있다. 역대기에서 르호보암과 므낫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전 왕조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보여주는 샘플이라고 할 수 있다. 역대기에 나오는 르호보암의 기사(대하 10-12장)는 열왕기에 나오는 르호보암 기사보다 내용이 길다. 이렇게 역대기 기자가 르호보암 기사에 많은 양을 첨가한 것은 심지어는 악한 이에게도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역대기 기자도 열왕기 기자처럼 르호보암을 비난하지만(대하 12:1-2,14), 역대기 기자의 주요 목적은 대하 7:13-14에 설명된 용서와 회복의 원리가 어떻게 그에게 적용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데 있었다.
한편 역대기의 므낫세 스토리는 그를 유다 왕국에서 가장 사악한 왕으로 묘사하는 열왕기와는 다르다. 역대기에서는 므낫세는 바벨론에 잡혀갔다 온 후(대하 33:11-16)에 개혁을 시도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므낫세의 회개는 역대기의 중심적인 주제 중 하나(하나님께서 회개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원리)를 입증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대하 24-25장에는 세 왕씩 묶어서 특정한 주제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역대기의 기본 원리가 어떤 방식으로 역사에 적용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트리오 |
왕의 이름 |
태도 |
1 |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
신앙을 보이다가 타락한 왕들 |
2 |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
부친의 길과는 상반된 태도를 보인 왕들 |
3 |
므낫세, 아몬, 요시야 |
회개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보인 왕들 |
1) 트리오 1: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역대기 기자는 대하 24-26장에서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의 세 왕을 신앙을 보이다가 타락한 왕의 패텬으로 묶어서 소개하고 있다.
2) 트리오 2: 요담, 아하스, 웃시야
한편 대하 27-32장에 나오는 세 명의 왕인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는 두 번째 트리오를 형성한다. 트리오 1처럼 삶의 전후반부가 상반되는 모습을 보인 왕들이 아니라, 평생 동안 한 가지 삶의 방식을 보이지만, 부친의 길을 의도적으로 저버린 왕들이다. 우선 요담(대하 27장)은 순종과 축복의 모델로 묘사된다. 그러나 아하스(대하 28장)는 부친의 길을 버린 사악한 왕으로 그려진다. 반면에 그의 아들 히스기야(대하 29-32장)는 부친의 잘못을 개혁하는 개혁자로 등장한다.
3) 트리오 3: 므낫세, 아몬, 요시야
한편 대하 33-35장은 회개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보인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므낫세, 아몬, 요시야 왕을 다루고 있다. 므낫세와 요시야는 겸비하여 회개한(33:12, 34:27) 왕인데 반해, 아몬은 겸비하지 않은(33:23)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렇게 역대기 기자는 특별한 행동방식에 따라 세 왕씩 묶어 설명함으로서, 역대기의 주요 주제인 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과 회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는 역대기 전체 구조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출처 바이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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