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조우용의 슬픈 가족사 속 두 어머니 이야기


ㆍ"'어머니'라 부를 수 있고 '우리 아들'이라고 불러주는 분이

ㆍ두 분이기에 행복합니다"

개그맨이라는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두 개의 가면이 있다.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무대에 오를 때면 어김없이 웃어야 하는 피에로의 가면 그리고 무대에서 내려와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상의 가면. 하지만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분장으로도 다 감출 수 없는 얼굴이 있다. 이 남자도 그랬다. 남들에게는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행복이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고, 더 이상 울지 않기 위해 억지로라도 잠시 웃어볼 수 있는 개그맨의 길을 택해 이를 악물고 버텨왔다.

데뷔 8년 차 조우용, 하지만 아직도 무명 개그맨



조우용(27)은 올해 데뷔 8년 차 개그맨이다. SBS 개그맨 공채 시험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방송계에 입문해 SBS-TV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하 웃찾사)에 출연해왔지만 그의 얼굴과 이름 석 자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김기욱 형이 저와 동기예요. 기욱이 형은 저보다 잘됐죠. 그나마 제가 출연한 코너 중에서 인기를 좀 끈 건 '혼자가 아니야'와 '동수야'였는데요. 그 안에서도 저는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옆에서 장단을 맞춰주는 잘 보이지 않는 존재였어요."

그나마 잠시 주목을 받았던 때는 동갑내기 친구이자 대학교 동기인 개그맨 김신영과 때 아닌 열애설이 났을 때다. 선배 개그맨 전유성, 이영자가 교수로 재직 중인 예원예술대학교 코미디연기학과를 나온 두 사람은 대학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개그맨을 꿈꾸던 그 당시 저희 둘 다 경제적 형편이 많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서로 응원을 많이 해주는 친구였죠. 사실 저희 과에서 김신영씨가 제일 예쁘기(?)도 했고요. 과에는 정말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코믹하게 생긴 사람들만 있었거든요. 우연히 술자리에서 벌칙으로 김신영씨와 뽀뽀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나중에 열애설이 난 거예요. 하지만 저희는 절대 친구 그 이상은 아니었답니다."

'웃찾사'에 이따금 출연하며 케이블TV에서 리포터, 사전 MC로 활동했던 그는 군에 입대해 지난해 2월에 제대했다. 하지만 그 사이 '웃찾사'는 저조한 시청률을 이유로 폐지됐고, 고향과 같았던 프로그램이 사라지자 그는 설 자리를 잃었다. 다른 방송 프로그램들 역시 이미 다른 개그맨 선후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후로 3개월 동안 방황했어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인지도 있던 개그맨들이 다 나가면서 소속사도 힘든 상황이었고요. 게다가 저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신인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일도 잘 들어오지 않았죠."

하지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개그맨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자신만을 바라보는 가족이 있기에 포기해서는 안 됐다. 결국 그는 여기저기에 직접 프로필을 돌리며 행사 MC를 보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금 이 자리에까지 왔다.

늘 혼자였던 막걸리집 아들, 외톨이 어린 시절


조우용이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어머니였다. 그는 남들과 조금 다른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 엄마와 단둘이 대구의 한 산동네에 살았어요. 아빠의 존재는 아예 모르고 살았죠. 엄마는 저를 키우며 혼자 막걸리집을 하셨는데 여자가 혼자 아이를 키우며 술장사를 한다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어요. 간혹 아저씨들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다가 엄마를 때리기도 했죠."

내성적인 성격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놀림도 많이 받았다. 그에게는 늘 가난하고 아빠 없는 불쌍한 아이, 남편 없는 술집 여주인의 아들 등의 수식어가 달렸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존재가 궁금할 때가 많았지만 물어보는 것조차 엄마에게 혹시 상처가 될까봐 그냥 꾸역꾸역 삼키며 모른 체하고 살았다.

"쪽방에서 새벽 늦게야 돌아오는 엄마를 기다리며 혼자 잠드는 일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엄마가 돌아오면 지지직거리는 TV 소리에 잠이 깼고요. 그래도 저는 힘들고 불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냥 그렇게 엄마랑 사는 것도 좋았으니까요."

7년 만에 알게 된 아버지 존재 그리고 새어머니

그러던 어느 날, 일곱 살이 되었을 무렵에 조우용은 엄마와 생이별을 하게 됐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엄마가 갑자기 제게 새 신발, 새 옷을 입히시더니 놀러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웬일이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저는 신났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엄마 표정이 참 많이 안 좋았어요."



놀이공원에 가는 줄 알았던 그가 한참을 걷다가 멈춘 곳은 낯선 아저씨 앞이었다. 일찍이 엄마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아저씨라는 존재에 대해 무섭고 나쁜 인상을 받았던 그는 엄마 손을 꼭 잡고 빨리 지나가자고 졸랐다. 그런데 그 순간 엄마는 우는 아들의 손을 놓았다.

"아저씨가 절 보더니 '얘가 우용이냐'고 하시더라고요. 엄마는 '예, 잘 부탁합니다'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울면서 가셨고요. 어린 마음에도 바로 알겠더라고요. '아, 엄마가 날 버린거구나' 하고요. 그 전에는 시장에서 종종 길을 잃거나 집에서 하루 종일 울면 엄마가 와서는 달래주셨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아무리 울어도 기어이 엄마가 매몰차게 저를 두고 가시더라고요…."

난생처음 보는 아저씨는 바로 그의 아버지였고, 그 후 아버지 집에서 새어머니,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에게 보내져서 자랐다는 친형, 그리고 새어머니가 낳은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하루아침에 바뀐 환경, 모든 것이 그에게는 낯설었다. 다시 친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죠. 그런데 새어머니는 정말 천사 같은 분이셨어요. 저와 친해지기 위해 말도 많이 걸어주고, 놀러 가자며 좋은 곳에도 데리고 가주셨고요. 당신이 낳은 친딸보다 제게 옷 한 벌을 더 사주는 분이셨어요. 하지만 저는 1년 동안 엄마라고 절대 안 불렀어요. 새엄마에게 엄마라고 부르면 나중에 친엄마를 못 만나게 될까봐…. 그래서 늘 아줌마라고 불렀고 아빠는 그런 저를 못마땅해 하시며 혼내셨어요."

하지만 새어머니의 끊임없는 노력은 그를 점차 변화시켰다. 2, 3년 후부터는 새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게 되었고, 어색하기만 했던 친형과 배다른 여동생과도 서로 마음을 털어놓는 우애 깊은 형제지간으로 발전했다.

초라한 환자로 누워 있던 친어머니, 눈물의 재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평화로운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열아홉 살의 조우용은 새어머니로부터 갑작스럽게 친어머니 소식을 듣게 됐다.

"새어머니가 할 말이 있다며 저를 부르시더니 친어머니가 많이 아프다고 하시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어디선가 잘 살고 계실 거라는 마음으로 그냥 잊고 살아왔으니까요. 그런데 새어머니가 병원에 가보라며 병원 이름과 호실을 알려주시는 거예요. 당황스러웠죠."

사실 그에게는 친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단둘이 가난하게 살 때 단 한 번도 그 상황을 불평한 적이 없었던 착한 아들을 왜 버려야만 했는지, 그리고 이제 와서 아프다고 연락한 이유는 무엇인지 무척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궁금하고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병원을 찾았고, 병실 앞에서 엄마의 이름을 확인했을 때는 무섭고 두려웠다.



"그때가 아마도 점심시간이었을 거예요. 12년 만에 만나는 엄마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상상이 안 됐어요. 일단 그냥 들어가서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이제야 왜 나한테 연락했느냐'고 따지고 싶었어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병실로 들어섰죠. 그런데 그 순간…."

말을 잇던 그가 인터뷰를 잠시 멈추자는 부탁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어머니 모습만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파요"라며 고개를 떨어뜨리던 그는 한동안 말없이 눈물을 닦아내시고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간이 오래 흘렀는데도 엄마를 한눈에 알아보겠더라고요. 그런데 차마 말을 걸 수가 없었어요. 다른 환자들은 보호자들이 옆에서 밥을 먹여주는데, 초라한 행색의 한 환자만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옆으로 누운 채 죽을 흘리면서 겨우 식사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불쌍하고 처량하기 짝이 없는 중년의 그 환자가 10년이나 떨어져 지내다 보게 된 우리 엄마였죠. 손을 덜덜 떨면서 간신히 음식을 입에 넣어 삼키는 모습이 놀랍고 충격적이었어요."

문 앞에서 한참 동안 바라만 보던 그는 다시 병실 밖으로 나와 마음을 추슬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는 않았다고. 자궁에 혹이 생겨 8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마쳤던 친어머니는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 환자복 일부가 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상태로 겨우 밥을 먹는 모습에 그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서야 다시 병실로 들어갔어요. 엄마 앞으로 다가가니까 '우용아'라고 작은 목소리로 부르시더라고요. 정말 오랜만에 맡아보는 엄마 냄새였어요. 피 냄새와 엉켜 있었지만 그래도 분명 제가 기억하는 엄마의 냄새와 온기였어요. 눈물이 펑펑 났어요. 아들 버리고 혼자 떠났으면 잘 살았어야지 왜 여기서 이렇게 보호자 한 명 없이 외롭고 초라하게 있냐고, 왜 이런 꼴이 됐냐고 엉엉 울면서 말했어요…. 어릴 적부터 엄마가 제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미안해'였는데 다시 만나서 제게 건넨 첫마디도 '미안하다. 못 키워줘서 미안하고, 못 보러 가서 미안하다' 였어요…."

그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이윽고 "그 날의, 그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아픈 기억이 됐다"고 연신 눈물을 훔쳤다.

노숙 생활 끝에 이룬 꿈, 웃어야만 하는 이유


조우용이 개그맨이 된 가장 큰 이유 역시 바로 '어머니' 때문이다. 웃으며 살아온 날보다 눈물로 살아온 날들이 더 많았던 친어머니, 친자식보다 더 큰 사랑을 베풀어주며 늘 든든한 힘이 되어준 새어머니에게 웃음으로 보답하고 싶었던 게 아들인 그의 마음이었다.

"짐 캐리가 평소 영화에서 재밌는 표정을 많이 짓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픈 어머니를 웃게 해드리고 싶어서였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랬어요. 두 어머니 모두에게 여쭤봤더니 개그맨이 되어서 힘든 사람들, 아픈 사람들 좀 많이 웃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누군가에게 웃음을 준다는 건 참 좋은 일이잖아요."

하지만 개그맨이 되는 일은 마음만큼 쉽지 않았다. 아들이 군인, 경찰과 같은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경제적인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무조건 개그맨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코미디연기학과에 진학했고, 늘 아들 편에서 힘이 되어주었던 새어머니가 대학 첫 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이후 개그맨 시험을 볼 때는 돈 한 푼 없이 무작정 상경했다. 걱정하던 새어머니에게는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끼리 다 같이 모여 합숙 생활을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낮에는 개그맨을 준비하는 친구들과 연습실에서 아이템을 짰고, 밤이 되면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가서 잤어요. 그렇게 한동안 노숙 생활을 했죠. 한 노숙자 아저씨는 제게 와서 말을 걸어주고 술도 사주셨어요. 알고 보니 중소기업 사장이었는데 부도가 나는 바람에 노숙 생활을 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게 '자네는 어려서 좋겠네. 뭐든 할 수 있으니 힘내게 젊은이'라고 응원해주셨어요. 희망을 얻었죠."

이후에는 반지하방에서 자취하는 친구 집에 얹혀살았다. 밤마다 담을 타고 넘어가 몰래 자다가 주인에게 걸려서 도둑으로 몰린 적도 있고, 지하철비가 없어 잔꾀를 부리다가 붙잡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지하철 역 한가운데서 무릎 꿇은 채 손을 들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가난과 싸워가며 반년을 보냈다.

"서울에 올라온 지 6개월이 지난 후 SBS에서 공채 개그맨을 뽑는 시험이 열렸어요. 떨어질까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참가했는데 은상을 탄 거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집에 가서 상장을 펴놓고 두 어머니께 가장 먼저 연락을 했어요. 정말 좋아하시더라고요."

비록 지금은 개그 프로그램이 많이 폐지되고 대학로 개그 무대마저 불황을 타고 있는 탓에 개그맨으로 사람들 앞에 서지 못하지만, 조우용은 언젠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그 무대 위에서 세상의 걱정근심일랑 모두 잊고 자신보다 더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시원한 웃음을 전할 수 있기를, 그래서 두 어머니와 함께 TV 앞에 앉아 웃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명절 때마다 대구에 계시는 두 어머니를 찾아가요. 전화 통화도 자주 하고요. 어머니가 없어 한 번도 엄마라는 말을 못해본 사람도 있는데, 저는 제가 '어머니'라 부를 수 있고 저를 '우리 아들'이라고 불러주는 어머니가 두 분이나 계시기에 오히려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고생하며 낳아주신 이옥자 여사님 그리고 배 아파 낳은 당신의 자식보다 더 아껴주고 사랑해주신 곽영수 여사님,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글 / 윤현진 기자 ■사진 / 강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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