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왜 그림을 못그리는가

당신은 왜 그림을 못 그리는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서 그림을 못 그린다는 것은 실제로 못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못 그린다고 생각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잘 한다와 못 한다를 가릴 수 있는 조건은

①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②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비교 대상들이 존재해야 하고

③ 그 대상들 간의 달성률의 우열을 가릴 수 있을 때 이다.

 

 만약 당신이 저 조건들에 대해

① 같은 목표 = 그림을 잘 그린다.

② 비교 대상 = 주위를 비롯하여 내가 모르는 그림을 그리는 모든 사람

③ 우열을 가릴 수 있는가 =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열이 느껴진다.

 

 대략 이와 같은 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림을 못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경쟁을 잘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일단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당신이 '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가'이다. 사람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와 원인이 있다. 당신이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그렇다. 그냥. 이런 게 아니다. 그 근원을 따지기 이전에, 당신이 '아, 난 왜 이리 그림을 못그릴까' 하고 고민하는 부류라면 당신이 그림을 그리는 목적은 '도피, 그리고 대안' 일 확률이 높다.

 

 예를 들자면, A라는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지만 중학교 진학 이후 성적 저조로 인해 주위로부터 심한 모멸감을 경험한 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결국 여기에서도 잘 한다는 것은 경쟁을 잘한다는 것이다) 그림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그림에 더 열을 올리게 되었다. 라는 식이다.

 

 하지만 스스로 자기 그림에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난 진실로 그림을 사랑한다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그림만 봐도 대강 알 수 있다. 진정으로 그림을 사랑한다면 그림의 기술적 완성도를 떠나서 선 하나 하나에 애정이 들어가고 보는 사람이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확실하게 느낀다.

 

 사람은 배고프거나 졸립거나 하는 육체적 변화는 잘 느끼면서 사랑과 같은 정신적 감정에 대해서는 항상 의구심을 품고 스스로를 의심하거나 타인에 의해 명확히 규정받기를 바라거나 아예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 자체를 피하려 하기도 한다.

 

 그림 뿐만 아니라 어떤 것에 진심이 담기게 되면 타인은 물론이고 자기 이성의 제어도 소용없이 감정을 표현하게 된다. 진정으로 그림을 향한 순수한 마음이 가득하다면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눈 앞에 종이가 있고 손에 펜을 들고 있는 상태만으로도 설레임이 시작된다.

 

 자, 당신은 어떤가. 그림을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나. 당신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 당신과 당신 그림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당신이 스스로 '난 그림을 못그린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저것 더 들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타인의 판단에 대해 '속단은 금물'이라는 말로 자신을 변호하고 가능성을 남겨두지만, 성급한 판단처럼 보이는 것이 깊은 통찰에 의한 것이라면 속단이라기보다 정확한 판단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경우도 많다. 퀴즈에서 질문을 다 듣지 않아도 답을 맞추는 것처럼.

 

 이 글의 목적은 당신에게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하여 그림을 그만 두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당신 스스로 못그린다고 느낄 뿐이라는 것이고 자기 자신과 그림에 대해 부정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림을 꼭 사랑하며 그릴 이유는 없다. 남들보다 순수하지 않으면 좀 어떤가. 결벽증과 완벽, 순수주의는 때로 그 어떤 것보다 스스로를 억누르고 괴롭게 하기도 한다. 마음껏 타락하고 더러워져도 좋다. 중요한 것은 나 자체를 긍정하고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즐겁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당신은 많은 노력을 했었다. 앞으로도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현재 의욕적이지 않다. 왜 그럴까.

 

 당신이 여지껏 힘든 방법을 선택하여 노력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인정받아 위안을 얻는 방법'

 

 나는 끼니를 해결할 때 밥 한 공기와 김만 있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날 봤을 때 맛있게 먹는다고 생각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이 돈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밥을 해줘야 하는 입장이라면 밥 한 공기와 김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한국인들의 큰 병폐 중 하나는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이다. 비교를 통해 자신을 각성시키는 원동력으로 쓰기도 하고 열등감, 좌절, 우월감, 행복, 불행, 도전, 시기, 평화.. 이런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을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버렸다.

 

 당신은 이미 공부로 경쟁을 경험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 지긋지긋했던 경쟁 속의 공부를 하듯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왜? 불안감 때문에. 자기 스스로 인정하는 것보다 타인의 한 마디가 자신에게 더 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비교하여 자극을 받으려 하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에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 방법은 힘들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목표를 달성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목적은 수단을 합리화 한다'라는 말이 좌우명으로 쓰이는 것처럼.

 

 하지만 당신은 좀 더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국 그림 그리는 목적이 무엇인가? 당신은 무엇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가? 나는 자유였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그림을 그렸다. 하얀 백지에서 만큼은 자유롭고 싶었다. 어떤 방법을 택할 것인가는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해야 하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고 쉬운 방법이어야 한다.

 

 하지만 난 이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내 생각보다 너무 많이 썼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 하나는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당신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굉장하다는 것이다. 이런 편협한 개인적인 그림에 대한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는 것은 대단하다.

 

 실질적으로 이 글이 당신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이 글이 잘 쓰여서가 아니라 당신이 잘 읽었기 때문이다. 난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움을 제공해 보았다. 그 중 자신에게 제공된 도움을 완벽하게 이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의 불안 요소 때문에 결국 그 어떤 도움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침식하고 있기도 하다.

 

 누군지도 모르는 당신이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것만으로도 난 당신을 만날 의향이 있다. 시공의 제한을 초월하여 어디가 되었던 언제가 되었든. 난 날 속박하고 제한하는 그 모든 것들을 거부하며 살아왔다. 진실로 자유롭고 싶었기에. 그래서 지금 난 자유롭다.

 

 난 지난 세월 그림을 그리는 과정 속에서 많은 어려움과 난관 속에서 홀로 수많은 시간을 지체하며 이제서야 내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얻었고 그 방법대로 아주 쉽게 살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그림으로 경쟁하며 지쳐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은 모른 채 다수의 방법대로 세상에 부딪혀 상처 받을대로 상처 받아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도 어떤 초심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당신이 어떤지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 그 예상은 맞을 것이다. 또한 당신의 그림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도 약간의 대화로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당신의 의지가 없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나를 비롯한 주위의 역할이 당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가 주위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도구화시키는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아주 천천히 일어난다. 단지 우리가 그 변화를 너무 빠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음, 졸려서 그만 쓴다.. 난 당신에게 당신이 어떻게 즐겁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에 대해 10시간 동안 말을 할 수도 있다. 당신이 필요하다면 난 당신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선택은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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